때로는 선의가 악의보다 더 위험하다
히말라야 8000m 고봉을 8개나 오른 산악인에게 어떻게 그런 위험한 일을 감당할 용기가 났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그는 “위험은 감당하는 것이 아니라 계산하는 것이다. 위험에 대한 계산이 끝났을 때 우리는 등잔한다”라고 말했다. 등반이 ‘계산된 위험’이라면 여행은 ‘계산된 모험’이다. 어른의 여행은, 특히 단체 여행은 무분별한 모험이어서는 안 된다. 계산된 모험이어야 한다.
여행은 계산된 모험이지만 간혹 위험에 빠질 때가 있다. 4년 전 히말라야트레킹이 그랬다. 우리 일행 중 몇 명이 극심한 고산중에 시달렸는데 우리는 그들을 위해 난로 주변 따뜻한 자리를 양보했다(그들의 산소포화도를 낮추는 위험한 일이었다). 옆 트레킹 팀에서는 고산증에 좋다며 이뇨제를 건넸는데 그것을 받아먹은 우리 일행 중 한 명이 심각한 상황에 빠졌다. 평소 저혈압이 있던 분이었다. 이뇨제는 평지에서도 저혈압인 사람은 부작용이 있어서 금지된다. 그를 살려내느라 모두가 매달려 겨우 구해낼 수 있었다.
해발 3840m 강진곰파 마을에 도착했을 때 여행 조감독은 놀면 뭐하냐며 사람들에게 마을산책을 가자며 선의의 제안을 했다. 함께 나간 네팔인 가이드는 빙하가 보이는 조망대를 보여주겠다며 또 다른 선의의 제안을 했다. 두 선의를 따라 일행이 어렵게 조망대에 갔을 때 가이드는 돌아갈 때는 안전한 길을 가자며 다른 길을 제안했다. 그러나 그 길은 눈에 덮여 보이지 않았고당황한 가이드는 길을 찾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들은 거의 조난당할 뻔했다. 나는 그들을 구하러 가자는 다른 일행의 선의를 막느라 정신 없었다. 우리도 저 언덕을 넘어가면 구조대가 아니라 조난대라고. 산악 전문 가이드와 포터 중 고산 등정팀 셰르파 경험이 있는 포토들이 가서 그들을 구해왔다.
위험을 초래한 것은 언제나 선의였다. 악의는 위험하지 않다. 사람들이 경계하고 저심하기 때문이다. 누구의 악의도 개입하지 않았지만 치명적인 위험에 빠진 적이 여러 번 있었다. 여러 번 이런 경험이 있었다. 겨울에 북한산 백운대에 오르는데 쥐가 난 일행에게 근육이완제를 건넨 사람이 있었다. 나중에 구조대가 와서 바윗길을 내려가야 할 사람에게 왜 근육이완제를 먹였냐고 타박했다.
설악산을 오를 때는 일행보다 현저히 뒤쳐져 오르는 60대 여성 2명을 일행이 응원하며 올려보내서 난감했던 적이 있다. 둘이 설악산을 오를 수 있도록 응원하던 사람들의 선의와 포기하지 않구 오르려는 그들의 인간의지가 더해져 정상에 오를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하산이었다. 그들은 너무 늦은 시간에 정상에 올랐다. 야간산행에 대한 준비가 전혀 되지 않은 그들의 멘탈을 붙들어가며 설악산을 하산하는 길이 쉽지 않았다.
위험은 늘 우리 주위에 도사리고 있다. 다만 위험을 위험스럽게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우리의 자세가 위험할 뿐이다. 모두가 들떠있을 때 누군가는 네가티브한 상상을 하고 대비할 필요가 있다. 특히 선의가 갖는 위험성을 들여다 볼 줄 알아야 한다. 스페인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투우사를 죽이는 것은 소가 아니다. 관중의 박수 소리다.” 새겨 들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