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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재열 여행감독 Jan 05. 2021

홍상수처럼 어슬렁거리다 낮술 한 잔? (서울 여행법)

여행감독의 색다른 서울 여행법 제2편

    

‘수고하고 짐 진 도시인을 위한 어른의 여행’을 고민하는 여행감독이라면 서울 여행을 어떻게 기획할까? 사실 사람들이 잘 모르는 곳을 대상으로 여행을 짜는 일은 어렵지 않다. 선택하지 않은 경우의 수에 대해 여행 참가자들이 알 수 없으니까. 하지만 잘 알고 있는 곳은 다르다. 그들 스스로 다른 경우의 수를 대입하며 여행을 평가하게 된다. 이런 이유로 서울 여행은 쉽지 않다.      


광화문 동십자각의 북쪽, 삼청동과 가회동을 걷다 보면 외국인 단체 여행객을 자주 만나게 된다. 그들이 ‘한국의 어제와 오늘’이라고 소개받을 그곳은 정작 우리에게는 '익숙한 낯선 곳'이다. 전통을 현대적으로 변주한, 혹은 남의 것을 우리 식으로 바꾼 낯선 것들로 가득 차 있다. 그런데 그곳에서 보이는 ‘우리가 경험하지 않은 우리의 모습’을 외국 여행객들은 ‘가장 한국적인 공간’으로 이해한다. 그렇게 ‘디스플레이된 서울’의 모습이 아닌 진짜 우리의 모습은 어디서 어떻게 볼 수 있을까?      


‘어른의 여행’을 고민할 때 가장 존중하는 것이 한량의 시선이다. 여행이란 본디 쓸데없는 것에 대한 관심, ‘유용한 무용함’이다. 한량은 그런 시선을 갖춘 사람이다. 서울의 한량이 누굴까 고민해 보았다. 홍상수 감독이 떠올랐다. 그의 영화에 등장하는 한량들, 홍상수 감독의 페르소나라 할 수 있는 그 한량들의 시선으로 서울을 돌아보면 재밌지 싶었다. 그래서 홍상수 영화의 흐름을 따라 서울 여행법을 구상해 보았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복기하며 서울의 뒷골목을 둘러보았다. 홍 감독은 예전에는 지방에서 영화를 찍곤 했는데 요즘은 서울에서 주로 영화를 찍는다. 〈우리 선희〉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 〈북촌방향〉 〈옥희의 영화〉 등 홍 감독의 많은 영화가 서울을 배경으로 하는데, 그 영화 속 배경을 눈여겨본 관객이 의외로 많다.     


몇 년 전 서울연구원은 홍상수 감독을 ‘서울 스토리텔링 어워드’ 후보로 추천한 적이 있다. 영화 속에서 아름답게 그려진 것도, 낭만적으로 묘사된 것도 아닌데, 사람들이 홍상수가 재현한 서울의 이미지를 소비하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눈치챈 것이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 나오는 밥집과 술집은 맛집으로 유명한 곳이거나 명사들이 두루 찾는 명소가 아니다. 주로 홍 감독에 의해 재발견된 곳이다. 여행의 묘미는 이런 재발견이다.      


홍 감독은 주변부를 배회하며 도시를 기웃거린다. 홍상수 감독은 서울의 뒷골목을 사랑한다. 〈오! 수정〉을 인사동 뒷골목에서, 〈극장전〉을 종로 뒷골목에서 찍은 홍 감독은 요즘은 북촌과 서촌을 배경으로 촬영 중이다. 물론 이전 영화와 마찬가지로 북촌과 서촌의 맛집이나 명소를 담아내지는 않는다. 그냥 그 골목을 배회하다 우연히 들어갈 것 같은 밥집과 술집이 영화의 배경으로 사용된다.     



홍상수 영화의 장소는 소풍을 가거나 데이트할 때처럼 들떠서 가기보다 회사에서 구조조정당하거나 좋지 않은 결과를 통보받고 찾아갈 만한 곳이다. 삶의 씁쓸함을 느끼고 혼자 감상에 빠지기 좋은 공간이다.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공원 벤치나 공중화장실은 그런 ‘불안정한 한가로움’을 맛보기에 적합한 곳이다. 한가로운 벤치에서 공중화장실에 간 동반자를 기다리면서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다면, 그것이 바로 홍상수 영화 주인공의 모습이다.     


홍상수 영화에 나오는 공원이나 궁궐은 휴일보다 평일에 가는 것이 영화의 정서를 느끼는 데 더 적합하다. 평일의 공원, 특히 관광객이 찾지 않는 한적한 공원은 마치 꾀병을 부리고 결석했다가 부모님 몰래 빠져나와 동네를 헤매고 다닐 때처럼 일탈의 느낌을 준다.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의 배경으로 나온, 빛바랜 신사임당상과 이율곡상이 있는 사직공원은 그런 느낌을 받기에 제격인 곳이다.     



반주로 소주를 마셔야 할 것 같은 밥집, 얘기하다 싸움이 날 것 같은 술집, 이런 밥집과 술집이 홍상수 영화에 주로 등장한다. 지인들과 한 번쯤 가보고 싶은 생각이 절로 든다. ‘지금 여기 우리’의 모습이 담겨있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의 주인공들처럼 쓸데없고 사소한 논쟁을 하면서 삶의 진정성을 느끼고 싶어서일 것이다.      


그런데 홍 감독 영화의 배경으로 나오는 술집과 밥집 중 특히 분위기가 좋아 보이는 곳을 갈 때는 한 가지 유념할 점이 있다. 그곳에 갔던 사람들 중에 ‘난 당신 같은 뜨내기는 관심 없다’는 주인의 표정을 읽어낸 사람이 많다는 점이다. 그 씁쓸함까지 즐길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이라면 도전해볼 일이다. 영화 때문에 ‘치킨을 시켜먹어야 할 술집’으로 떠오른 ‘아리랑’의 여주인은 문의 전화에 “술 마시려면 저녁은 먹고 오세요”라고 응수했다. 와서 치킨을 시켜달라는 손님이 많은 눈치였다.      


홍상수 감독이나 영화에 출연했던 배우들이 자주 가는 단골집은 정해져 있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부터 홍 감독 영화에 출연했던 배우 김의성 씨는 “한식당 다정과 주점 소설을 자주 가는 편이다”라고 말했다. 두 곳 모두 문화예술인들에게 인기가 있는 곳이다. 〈북촌방향〉의 무대였던 주점 ‘소설’에 소설가 고종석 씨를 앞세우고 간 적이 있다. 주로 중장년층 손님이 많았는데 무리와 무리 중에 아는 사람이 있어 서로 인사를 나누고 자연스럽게 술자리가 합쳐졌다.     



〈오! 수정〉과 〈북촌방향〉에 등장한, 임연수 구이가 유명한 ‘전봇대 집’이나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에 나온, 닭볶음탕이 맛있어 보였던 ‘원창식당’은 부담 없이 갈 수 있는 곳이다. 원창식당 옆의 청국장 집도 맛집으로 유명하다. 원창식당 주인아주머니는 영화 출연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영화 이야기를 꺼내면 기분 좋게 촬영 당시 이야기로 수다를 떨고 서비스 반찬도 가져다준다. “우리는 조미료를 안 넣는 식당이에요. 원래 홍상수 감독의 프로듀서가 단골이에요. 영화 개봉하고 손님이 늘었는데, 〈우리 선희〉가 개봉하면서 영화발이 떨어졌는지 손님이 줄었어요”라고 말했다.     


원창식당에서 모퉁이를 돌면 나오는 ‘사직동 그 가게’는 짜이(밀크티)로 유명한 곳이다. 서울에서 가장 맛있는 짜이를 마실 수 있는 곳 중 하나다. 짜이를 직접 만들어본 사람은 그 맛을 제대로 내는 것이 쉽지 않다는 사실을 안다. 조금만 묽게 타면 밍밍하고 조금만 진하게 타면 맛이 틀어진다. ‘사직동 그 가게’는 우리 입맛에 잘 맞는 짜이를 만드는데, 인도 남부의 디저트인 ‘도사’를 곁들여 마시면 일품이다.     


서촌은 이런 조그만 문화 아지트가 꾸준히 들어서는 곳이어서 두리번거리는 재미가 있다.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의 주인공 해원처럼 비 오는 날 청바지에 백팩을 메고 돌아다니는 것도 좋지만 원래 서촌은 오후의 볕이 좋은 곳이다. 볕 좋은 날 원창식당에서 점심을 든든히 먹고 난 후 사직동 그가게에서 짜이 한 잔을 마시면 세상에 부러울 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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