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 커피 보이차에서의 취향
@ 트위터에서 본 문과취향 vs 이과취향
트위터 초기에 나름 인플루언서 행세를 했다. 팔로워가 제법 많았다. 그때 개발자들을 많이 접했는데 테크놀로지에 대한 접근법이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나는 트위터를 향유하는데 관심이 많았는데 그들은 트위터의 기능을 파악하는 것이 먼저였다.
비유하자면 사격장에서 다양한 총을 쏘아보고 이 총은 이런 특징이 있구나, 저 총은 저렇구나, 이런 것을 파악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사람이 그들이었다. 반면 나는 사냥하는데 가장 유용한 총을 고르려는 사람이 있다. 나는 트위터를 나의 사냥총으로 선택했고 제법 성공했다.
@ 오디오 취향에서 나타나는 차이
오디오 취향에서도 비슷한 차이가 나타난다. 오디오에 취향인 사람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하나는 오디오 장비 자체에 취향인 사람, 다른 하나는 오디오에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오디오로 듣는 음악에 더 관심이 많은 사람.
그래서 오디오 자체가 목적인 사람은 듣는 음악이 제한적이라고 한다. 오디오 기능을 비교할 수 있는 음악들을 반복적으로 들으면서 다양한 오디오를 경험하려 한다. 반면 음악 자체가 목적인 사람은 오디오를 바꿔가며 듣는 것이 아니라 음악을 바꿔가며 듣는다.
@ 와인은 수단인가 목적인가
와인에 있어서도 와인을 수단으로 바라보느냐 목적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차이가 나타난다. 한국에는 와인을 목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제법 많다. 나의 경우에 와인은 수단이다. 음식을 맛있게 먹고 술자리의 사람들과 분위기를 업하는 수단. 그래서 페어링에 관심이 많다.
와인을 수단으로 삼기 위해서는 와인맛의 4사분면에 좌표를 찍을 줄 알면 된다. 어떤 음식에 화이트 혹은 레드가, 어떤 음식에 스위트 혹은 드라이가, 어떤 음식에 바디감 있는 것 혹은 없는 것이, 어떤 음식에 산미 있는 것 혹은 없는 것이, 어떤 음식에 탄닌 있는 것 혹은 없는 것이 어울리는지만 알면 된다. 여기에 와인 품종 특징 정도.
그런데 한국에서 와인 좀 한다는 사람은 여기서 훨씬 더 나간다. 와인 산지와 와인 브랜드도 줄줄 꿰고 있어야 하고 빈티지와 떼루와까지 운운한다. 그런 사람들을 보면 ‘아니 와인 장사를 하시지, 그 아까운 와인 지식을 가지고…’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서 저런건 소물리에가 알고 있으면 되지 않나, 우리는 돈을 지불하고 적절한 와인을 추천 받으면 되는데…‘ 하는 생각도.
와인이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 되려면 경제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레스토랑에서 와인에 대한 지불의사가 음식과 1:1 이상이어야 한다. 하지만 나는 1:0.5 이하다. 돈을 더 쓴다면 맛있는 음식을 더 시키는데 쓰겠다. 참고로 여행 때 레스토랑에서 와인에 대한 지불의사를 유심히 보는데, 수십억 수백억 자산가들도 대부분 1:0.5 이하였다.
@ 커피는 수단인가 목적인가
커피에 대해서도 와인과 비슷한 공식이 적용된다. 수단인지 목적인지. 다행히 커피는 비싸다고 해도 와인에 비하면 가격 곡선이 그리는 커브가 가파르지 않아 기분 내고 싶으면 낼 수 있는 정도다. 파나마 게이샤 가격은 ‘네가 커피값으로 얼마까지 내는지 보고 싶어’라고 속삭이는 듯하다.
에티오피아 예가체프로 커피투어를 갔을 때 흥미로운 모습을 보았다. 예가체프로 가는 길에 숙박을 하거나 식사를 하기 위해 반드시 들러야 하는 호텔이 있다. 사업이 아니라 커피에 대한 취향 때문에 예가체프 견학을 가는 사람들이 있는데, 딱 두 나라 사람들이다. 한국인과 일본인. 한국인 쪽이 훨씬 많았고.
@ 여행자에게는 선택지가 없다.
와인이나 커피에 대한 내 취향이 이 모양인 이유는 여행자에게는 선택지가 없기 때문이다. 어디 나라를 가든 대부분 그 나라 와인을 마신다. 와인 브랜드 지식이나 산지 지식 그리고 품종 지식은 무용하다. 듣도 보도 못한 브랜드 산지 품종의 와인을 마시게 된다. 그런데 그 와인들은 대체로 그 나라 음식과 잘 어울린다. 고민할 필요가 없다.
커피는 아예 내리는 방식이 다르다. 방식이 비슷하다고 해도 그 나라 표준 취향이 우리와 다르다(아메리카노의 농도 등). 우리가 마시는 커피와 비슷한 커피를 마실 수 있는 곳은 일본이나 미국 정도다. 다른 곳에 가면 평소에 맛있게 마시는 스타일의 커피를 마실 수 있는 게 아니라, ‘아 여기서는 이렇게 마시는구나’ 하는 커피를 마신다.
한국에서 즐기는 와인을 세계 어디서든 즐길 수 있을 정도로 글로벌 유통력을 가진 와이너리는 없다. 저렴한 이탈리아 와인 정도가 제3세계 마트에서 구할 수 있는 글로벌 와인이다. 글로벌 유통망을 갖춘 주류는 면세점 독주를 제외하면 하이네켄이나 일부 글로벌 브랜드 맥주뿐이다.
와인 브랜드나 산지에 무심한 이유는 재현 가능성이 없기 때문이다. 와인은 주로 여행 가서 마신다. 현지 가격을 알고 있으면 웬만해선 한국 레스토랑에서는 와인에 손이 가지 않는다. 마트에서도 굳이 살 필요가 없다. 나가면 또 많이 마시는데, 한국에 있는 동안이라도 전통주나 막걸리를 마시고 싶어서.
@ 보이차와 자사호
한국인들은 보이차를 자사호에 마신다. 중국인들도 그럴까? 아마 중국에서 보이차를 자사호에 마시는 사람은 아주아주 소수일 것이다. 이것은 한국인들이 누리는 호사다.
자사호 산지 이싱에 자사호 수입사 분들과 간 적이 있다. 그들에게 자사호 명인들에게 선물하는 것이 있다. 보이차다. 현지인들은 자사호에 현지 차(홍차나 우롱차)를 주로 마시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보이차 산지에 가면 자사호를 선물한다고 했다. 그쪽에서는 그냥 평범한 다기에다 보이차를 마신다고.
@ 다시 한국인의 와인 취향에 대하여
한국의 와인 동호인들은 와인 시음회를 좋아한다. 여러 가지 와인을 놓고 비교 시음하는 것을 즐긴다. 가벼운 모임에서도. 그런데 와인 역사가 오래된 곳들은 와인을 잘 섞어 마시지 않는다. 한두 가지 와인을 많이 준비해서 일관성을 둔다. 왜? 음식이 주인이니까.
와인을 여러 가지 준비할 때는 애피타이저부터 디저트까지 페어링이 된 경우다. 이런 형식은 와이너리에 딸린 고급 레스토랑에서 볼 수 있는데 자신들의 와인이 돋보일 조합을 궁리한다. 한국처럼 다양한 레드와인을 두루 시음하는 경우는 좀처럼 볼 수 없다.
나는 지금 나타나는 한국인의 와인 취향이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여행지도 처음에는 두루 살펴보다가 자주 오는 사람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곳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을 느끼고 간다. 와인에 대해서도 탐색이 끝나면 그렇지 않을까? 같이 마시는 와인보다, 같이 마시는 사람에 집중하는 시간이 곧 오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