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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재열 여행감독 May 14. 2024

땅콩을 따던 소년

나의 첫 아르바이트


어린이날이나 석가탄신일이 있는 5월은 달갑지 않은 달이었다. ‘5월은 푸르구나, 우리들은 일한다’ 정도로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농촌에서 5월은 농사일이 바쁜 농번기다. 학교가 쉬면 당연히 징발되어 농사일을 도와야 한다. 그래서 어린이날이나 석가탄신일이 싫었다.


봄에는 학교에서 단체로 농활을 하기도 했다. 모를 심거나 보리를 베거나.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 5/6학년 때도 이런 농활을 했다. 보리를 베다 간혹 낫으로 발을 찍는 친구도 있었다. 그때 새참으로 먹었던, 다라이에 담긴 퍼진 라면이 참 맛있었던 기억이 난다.


추수철인 가을에는 아르바이트를 했다. 수확철엔 농촌에도 돈이 풀린다. 그때 주로 했던 알바는 땅콩 따기였다. 파서 며칠 놔둬서 바싹 마른 땅콩의 흙을 털어내고 포대에 담는 일이었다. 처음 땅콩을 땄던 것이 열살 무렵이었던 것 같은데, 내가 일해서 직접 돈을 번 최초의 경험이었다. 



여행감독으로 전향하고, 월급 받기를 그만두고 하루살이는 아니고 한달살이로 코로나19 시기를 버티면서, 땅콩을 따던 소년을 기억했다. ‘35년 만에 내가 다시 땅콩을 따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는 하루에 만 원을 버는 것이 목표였었다. 지금 우리 둘째보다 더 어린 나이에.


비닐 비료 포대에 넣으면 800원, 마대 포대에 넣으면 1200원이었다. 그 시절 땅콩밭은 지천이었다. 친구들과 놀러 가는 중이라도 땅콩밭에 사람들이 앉아 있는 모습이 보이면 우리도 달려가 땅콩을 땄다. 노느니 이 잡는 게 아니라 노느니 땅콩을 땄다. 땅거미가 질 때까지 그렇게 하루 종일 땅콩을 붙들었다.


그때 만원은 넘사벽이었다. 비료 포대로 12개 반을 따야 받을 수 있었다. 도저히 이를 수 없는 목표였다. 열심히 하는 것만으로는 안 돼서 흙을 묻힌 채로 따서 넣기도 하고 땅콩 덤불을 넣기도 하는 꼼수를 부려야 가능한 목표였다. 만원은 넘사벽이었다.



새벽부터 땅콩을 따기 시작한 어느 날, 정말 오줌 싸고 뭐 볼 시간도 없이 땅콩을 붙들었던 어느 날, 드디어 만원을 채웠던 기억이 난다. 지는 해를 바라보며 얼마나 뿌듯했던지.


땅콩을 따고, 스스로 돈을 벌어보고, 세상살이 힘겨움을 느끼기 시작했던 것 같다. 땅콩을 따서 번 돈으로 동아전과를 샀고, 그 표준전과로 공부를 해서, 상장을 받고 미래를 꿈꿨다.


내가 내 스스로의 숙제를 풀어갈 수 있게 길을 내준 것은 그때 그 땅콩포대가 처음이었던 것 같다. 지금도 땅콩을 먹을 때면 뭔지 모를 서글픔이 밀려온다. 누군가의 조막손을 혹은 주름진 손을 거쳤을 그 땅콩 포대를 생각하면서.



예전에 굴업도에 갔을 때, 지금은 보기 좋은 언덕의 초지가 1980년대에는 땅콩밭이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사람들을 따라 걸으며 자꾸 뒤돌아 보았다. 그 언덕 어딘가에 어린 내가 앉아 땅콩을 따고 있는 것만 같았다.


땅콩을 따던 그때의 내 손, 손톱에 때가 낀 내 손을 기억한다. 그리고 아이의 손을 본다. 땅콩을 따기에 좋은 손이다. 이 손으로 땅콩을 따면 세상을 절실하게 느낄 것이다. 땅콩이 아니라 그 무엇이라도 절실하게 집어 들면 세상을 배우게 될 것이다. 땅콩이 아니더라도, 다른 무엇인가가 아이들의 세상을 열어줄 것이다. 그때가 되면, 대견하면서도 섭섭할 것 같다.



스스러 움켜잡는 것이 생기면 더 이상 나에게 의지하지 않을 것이다. 캠핑 가서 밤에 화장실에 갈 때 무섭다고 같이 가자고 하지도 않을 것이고. 그런 생각을 하니 조금 서운한 마음도 든다. 아이들의 손이 땅콩을 안 집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집더라도 좀 나중에 집었으면… 그렇게 어른이 되면 왠지 남이 될 것 같은 서운함이...


땅콩은 그렇게 나에게 세상을 열어주었다. 땅콩을 열심히 따면 미래가 열릴 것 같은 그 시절이 그립다. 원고, 강연, 심사, 자문, 컨설팅…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면서 버텼던 코로나19 시기 때 ‘또다시 땅콩을 따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다. 어떻게 그 터널을 지나왔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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