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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재열 여행감독 Jan 10. 2021

양림동을 여행할 때 필요한 세 권의 시집

가장 보수적인 선교사들이 만든 가장 진보적인 도시

양림동 호랑가시나무 게스트하우스


    

광주의 시계는 늘 1980년 5월에 멈춰있다. 마치 광주의 역사는 1980년 5월에서 시작하는 것처럼, 광주에게 가는 사람은 맨 처음 광주민주화운동을 떠올린다.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을 빼고 광주를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그 1980년에 광주가 함몰되어 있는 것 또한 현실이다. 광주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시간을 더 거슬러 올라가볼 필요가 있다. 광주의 속살을 들여다보기 위해 추천하는 곳은 바로 양림동이다.


근세까지 초분들이 있는 풍장터였던 양림동 언덕에 미국 선교사들이 교회를 세웠다. 그리고 가장 보수적인 교단 출신인 이들이 가장 진보적인 도시의 초석을 닦았다.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이 있기 반  세기 전인 1929년 광주학생운동이 있었는데, 이들이 심어준 근대의식이 미친 영향이 컸다. 양림동은 광주의 근대를 더듬어볼 수 있는 곳이다.  


이 양림동을 둘러보기 위해서는 세 권의 시집이 필요하다. 김현승의 시집 <마지막 지상에서>, 그리고 이수복의 시집 <봄비>, 곽재구의 시집 <사평역에서>가 바로 그 시집이다. 이 시집을 미리 읽고 가야 양림동을 풍부하게 느낄 수 있다.



# 수피아여고의 외팔이 여선생     


광주의 대표적인 구도심인 양림동은 1980년 이전의 광주를 볼 수 있는 곳이다. 그리고 광주의 역사가 1980년 광주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알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광주 시민들이 ‘민주화 운동의 대모’ 혹은 ‘광주의 어머니’로 부르는 고 조아라 여사의 삶이 대표적인 경우다. 조 여사는 5·18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수습대책위원으로 활동했다가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그녀의 인생은 바로 광주의 역사다. 조 여사는 양림동의 수피아여고를 다닐 때인 1929년 광주학생 항일운동에 참여해 옥고를 치렀다. 신사참배 거부하며 ‘은가락지 동맹’을 만들어 저항했던 그녀는 학교를 졸업하고도 옥살이를 해야 했다.      


선교사들이 만든 수피아여고의 항일 운동사는 1919년 3·1 운동 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0일 뒤인 3월 10일 광주천에서 열린 만세 시위에 수피아 여고생들도 두루 참여했다. 최연소 독립투사인 최현숙(최수향)을 비롯해 윤형숙(윤혈녀), 김안순, 박애순 등이 참여해 23명이 구속되었다. 이중 가장 극적인 삶을 살았던 독립운동가는 윤형숙 선생이다. 수피아여고 교정에 세워진 기념비에 선생의 이름은 ‘윤혈녀’로 기록되어 있다. 만세 시위에 앞장서 태극기를 흔들던 선생의 왼팔이 일본 순사의 칼에 잘렸다. 왼팔이 잘린 상태로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선생은 오른손으로 태극기를 잡고 다시 흔들었다.      


수피아여고와 함께 선교사들이 양림동에 만든 또 다른 학교인 숭일학교 역시 항일의 요람이었다. 3·1 운동 때에는 교사 및 전교생이 선봉이 되어 활동하다가 25명이 투옥되었고, 학생 송광춘 옥사하였다. 교명인 ‘숭일’은 유일한 하나님만을 섬긴다는 뜻인데, 1937년 수피아여학교와 함께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자진 폐교했다(숭일학교는 이후 학교를 북구로 옮겼다).      


‘가을의 기도’와 ‘플라타너스’를 쓴 다형 김현승 시인이 바로 이 숭일학교 교사 출신이다. 김 시인 역시 신사참배 거부로 인해 광주경찰서에서 물고문을 당한 적이 있다. 양림동에 김 시인의 흔적은 호남신학대학 교정에 있다. 무등산이 마주 보이는 호남신학대학 언덕에 펜촉을 형상화 한 시비가 있는데 여기서 첫 번째 시집을 꺼내서 읽어보자.       


이 땅은 비어 있다(김현승)

몇 사람의 떨리는 음성으로도 / 몇 사람의 분노로도 / 또는 탄식으로도 차지 않는 / 이 땅은 비어 있다

몇 사람의 노래로도 / 몇 사람의 웅변으로도 / 몇 사람의 울음 섞인 기도로도 / 차지 않는

이 땅은 비어 있다

아침 출근에 미어터지는 버스로도 / 돌아오는 저녁의 빽빽한 안개로도 / 가득 차지 않는 비탈마다 늘어서는 / 판잣집으로도 / 이 땅은 비어 있다.  


    


# 중국 공산당 간부들이 광주에서 눈물을 훔치는 이유     


1980년만큼 시선을 줄만한 것은 바로 광주의 1930년이다. 광주학생항일운동으로 전국에서 전국에서 582명이 퇴학당하고, 2,330명이 무기정학을 받았으며 1,642명이 검거되었는데, 주로 광주 학생들이었다. 양림동은 엘리트 학생에서 하루아침에 퇴학생/정학생이 된 징계 학생들이 나라도 잃고 학교도 잃은 울분을 달래던 곳이었다. 이들이 날마다 모여서 나눈 이야기와 결의가 이후 광주 문화예술의 자양분이 되었다.      


특히 선교사들이 전한 서양문화와 예향의 전통문화가 결합하면서 독특한 문화예술적 성취를 이루었다. 언덕 하나를 두고 서쪽에는 서양문화 전파가 활발하고 동쪽에는 대표적인 광주의 부촌이 형성되어 있어 양림동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 음악가 중에서 세계적인 음악가가 두 명이나 나왔다. ‘옌안송’과 ‘팔로군행진곡’ 등을 작곡해 중국 공산당이 국민작곡가로 꼽는 정율성(1914-1976) 선생과 러시아 차이코프스키의 4대 직계 제자로 꼽히는 정추(1913-2013) 선생이 양림동 출신이다(정율성 선생의 생가 터가 양림동에 있다).  양림동의 정율성 생가터는 중국 공산당 간부들의 단골 방문지다. 이곳에서 그들은 '옌안송'과 '팔로군행진곡'을 들으며 눈물을 훔친다.     

읍이 시가 되고 시가 광역시가 되는 과정에서 양림동은 전통문화와 서양문화, 도시문화와 시골문화가 만나는 접점이었다. 일제시대 이후에는 남광주역이 그 관문이었다. 문화예술 해설사 이춘홍 씨는 “남광주역은 도시와 농촌이 만나는 접점이었다. 새벽 도깨비시장이 열렸다. 시골 사람들이 이고 지고 온 야채를 도시 사람들이 사곤 했다”라고 추억했다. 이 남광주역을 추억할 수 있는 시가 바로 곽재구 시인의 시 ‘사평역에서’(남광주역은 현재 폐쇄되었다).      


사평역에서(곽재구)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 흰 보라 수수꽃 눈 시린 유리창마다 / 톱밥 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 한 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 모두들 알고 있었다...     


 


# 갈까마귀가 서성거리던 초분골     


이제 시간을 더 거슬러 올라가 보자, 1919년과 1929년 양림동은 대한민국의 어느 곳보다 더 뜨겁게 끓어올랐다. 그렇다면 이들의 의협심을 견인했던 것은 무엇일까? 1904년이 기점이 아닐까 싶다. 1904년 12월 25일 광주의 운명을 바꾸는 예배가 양림산 언덕에서 진행되었다. 미국 남장로교 소속 선교사 유진 벨(배유지·1868~1925)과 오웬(오기원·1867~1909)이 구경 나온 주민들과 함께 첫 예배를 드렸다. 첫 예배를 기념하는 선교비가 사직도서관 앞에 세워져 있다.      


양림동은 한국 기독교의 전래 당시 모습을 볼 수 있는 드문 곳이다. 오웬기념관이 대표적이다. 문이 직각 방향으로 달려있는데 남녀가 다른 출입구로 들어가서 따로 앉아서 예배를 보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양림동에 선교사들이 남긴 근대문화유산 중 하나는 바로 독특한 식생이다. 선교사들이 옮겨 심은 외래식물을 만날 수 있다. 크리스마스트리 장식 나무로 알려진 호랑가시나무를 비롯해 은단풍과 흑호두나무 등 희귀 식물이 곳곳에 있다.      


광주가 도시화되는 과정에 이들 선교사들이 큰 역할을 했다. 당시 전주의 인구가 5만 명이고 나주의 인구가 3만 명일 때 광주의 인구는 8천 명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데 선교사들이 광주에 들어오면서 광주가 교육과 의료의 중심지가 되면서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된다. 선교사들이 만들었던 시설은 후에 광주기독교병원 기독간호대학 호남신학대학 등으로 바뀌어 여전히 양림동에 남아있다.       


선교사들은 그리스도의 가르침대로 낮은 데로 임했다. 이들이 처음 자리를 잡은 곳은 광주읍성 밖의 양림산 기슭이었다. 당시 양림산 기슭은 일종의 풍장이라 할 수 있는 초분(풀로 임시로 만든 봉분)이 있던 곳으로 ‘초분골’로 불리던 곳이었다. 갈까마귀가 서식하던 이 버려진 땅 5만 6천 평을 사들인 선교사들은 이곳을 호남 선교의 교두보로 삼았다.   


   


# 가장 보수적인 선교사들이 만든 가장 진보적인 도시     


불의에 항거하는 광주의 힘의 원형을 볼 수 있는 곳은 양림산의 선교사 묘역이다. 양림산 정상에 이국적인 풍경을 그려내는 선교사 묘역은 세계적으로도 드문 곳이다. 여기에 초기 선교사들의 묘역이 조성되어 있다(선교사 묘역 주변에 이들의 이름을 딴 산책로도 조성되어 있다). 대한간호사회를 창립하고 영양실조로 죽은 엘리자베스 세핑(서서평 1880-1934))을 비롯해 수십 명의 선교사 묘비가 있다. 광주민주화운동 때도 이들은 ‘시대의 정직한 목격자’ 역할을 수행했다.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피터슨 목사가 광주 상공의 헬기가 기총소사를 하는 것을 목격하고 외신에 증언해 줘서 신군부의 폭력을 국외에 알릴 수 있었다.     


남장로교는 보수 교단이다. 미국에서 가장 보수적인 교단에 속한 선교사들이 목회 활동을 한 곳이 가장 진보적인 도시가 되었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그들에게는 가장 보수적인 것이 우리에게는 가장 진보적인 것이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선교사 묘지 옆에는 한국전쟁 당시 희생된 850명의 광주 전남 지역 순교자를 기리는 순교탑이 있다. 이들은 대부분 한국전쟁 때 공산주의자들에게 학살당했다.      


‘광주의 어머니’라 불리는 곳이지만 양림동은 도청이 이전하고 광주가 신도심 위주로 발전하면서 다소 쇠퇴했다. 김현승 시인이 거주했던 집이 흉가로 방치되어 있고 맞은편의 정율성 생가도 표지판만 있을 뿐 전혀 복원되어 있지 않다. 정율성 기념 시설은 인근의 아파트 담벼락에 꾸며져 있는데 중국 공산당 고위 간부들이 현장을 찾아서 눈물을 흘리곤 한다고 한다. 그것이 연안송 가락이 애틋해서인지 정율성 선생이 홀대받고 있어서인지 모를 정도다.      


요즘 광주광역시는 광주를 아시아문화중심도시로 만들겠다면서 양림동에 새롭게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잊힌 인물들의 기억을 복원하기 위해 다양한 조사사업을 벌이고 있다. 이제 마지막 시집을 꺼낼 차례다. 김현승 시인과 함께 양림동의 대표시인으로 꼽히는 이수복 시인이다. 한국적 서정을 한의 미학으로 승화시켰다는 이수복 시인의 ‘봄비’다.      


봄비(이수복)

이 비 그치면 / 내 마음 강나루 긴 언덕에 / 서러운 풀빛이 짙어오것다.

푸르른 보리밭길 / 맑은 하늘에 / 종달새만 지껄이것다.

이 비 그치면 / 시새워 벙글어질 고운 꽃밭 속 / 처녀애들 짝하여 새로이 서고

임 앞에 타오르는 / 香煙과 같이 / 땅에서 또 아지랑이 타오르것다.      


양림살롱 여행자카페에서 여행자들이 환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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