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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재열 여행감독 Jan 10. 2021

남한산성을 겨울에 걸어야 하는 이유

눈이 오고 난 뒤에는 남한산성 수묵 트레킹을 추천한다

 


겨울 세시풍속으로, 남한산성 수묵 트레킹을 한다. 방법은 간단하다. 남한산성을 따라 걷고 흑백 애플리케이션으로 돌려보는 것이다. 그러면 마치 역사 속으로 들어갔다 나온 느낌이다. 이번에는 동문에서 남문으로 청나라 장수 용골대에 쫓기는 연락관처럼 바삐 가로질렀다(메인 구간이라 할 수 있는 남문~북문 구간은 코로나 방역을 위해 폐쇄되었다).      


시절 인연처럼 시절 여흥 또한 있다고 생각한다. 한탄강 얼음 트레킹을 걸으며 얼음이 부딪치면서 물아래로 공명하는 소리를 듣고 눈 오는 날 한양성곽길을 걸으며 눈 쌓인 고궁을 내려다보는 것처럼 차가운 성벽을 보며 남한산성 둘레길을 걷는 것은 나만의 겨울 세시풍속이다. 성벽의 곡선이 유려한 곳에서 군데군데 사진을 찍으며 걸으면 된다.      



흥한 나라 유적지는 ‘관광객’이 가지만 망한 나라 유적지는 ‘상념객’이 간다고 했던가? ‘망국의 정한’이 유난히 좋았다. 천년 고도 경주보다 비극적 패자의 잔상인 남아있는 부여가 좋았다. 만약 학생 때 수학여행지로 왔다면 볼품없다고 실망했을 것이다. 그런데 마흔이 넘으니 유적지 하나하나가 가슴에 박혔다. 낙화암에서 낙조를 보며 느끼던 그 소슬한 기분을 잊지 못하겠다.      


겨울 남한산성 성곽길이 그렇다. 애잔해서 좋았다. 인조의 굴욕이, 그 굴욕을 소설로 풀어낸 김훈의 고뇌가 알알이 박힌다. 잎이 지면 나무들이 시야를 가리지 않아서 성곽이 더욱 도드라진다. 색을 가진 것들의 색이 지워지면서 산성의 앙상한 뼈대가 드러난다. 그 뼈대를 따라 걸으며 느끼는 중년의 우울을 권한다.      



본디 남한산성 성곽길은 4계절이 다 좋다. 성곽 틈새로 여기저기 풀이 삐져나오고 이름 모를 들꽃들이 인사하는 봄도 좋고, 소나무 그늘이 유난히 시원한 여름도 좋고, 색감이 풍부해지는 가을도 좋다. 하지만 겨울 남한산성 성곽길이 일품이다. 그림으로 치면 봄 여름 가을의 남한산성 성곽길이 채색화라면 겨울 남한산성길은 수묵화다.      


수묵화보다는 판화가 더 적합할 것 같다. 거친 칼질의 목판화 같은 느낌의 길이 바로 겨울 남한산성길이다. 남한산성에서 북쪽으로 올려다보면 한강을 낀 벌판이 보인다. 그 벌판을 가로지르는 여진족의 말발굽 소리가 혹은 긴 포물선의 궤적을 그리는 홍이포의 우레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남한산성 수묵 트레킹을 위해 가장 무난한 코스는 남한산성 유원지 입구에서 남문 쪽으로 올라가 서문을 거쳐 북문까지 간 다음 성 안으로 내려오는 길이다. 5km 정도밖에 되지 않는 길이다. 조금 부족하다 싶으면 북문에서 꺾어 내려오지 않고 동문을 거쳐 다시 남문까지 완주하면 된다. 이렇게 하면 거리가 제법 되지만 부지런히 걸으면 한나절에 돌 수 있다.      


이왕 겨울에 갈 것이면 되도록 석양 트레킹을 권한다. 남한산성 수묵 트레킹은 오후 세시 반 정도 동문에서 시작해 남문을 지나 서문에서 종료하면 지는 해를 따라서 걸을 수 있다. 이번에는 남문~서문~북문 구간이 폐쇄되어 남문에서 트레킹을 마쳤다.  남한산성 성곽길은 성 안팎을 드나들 수 있는데 되도록 바깥쪽에서 걷는 것이 운치가 있다.       


남한산성은 육산이라 암반 구간이 적어 겨울에도 비교적 안전한 편이다(그래도 아이젠은 착용해야 한다). 동서남북으로 서울과 한강 그리고 서울의 위성도시를 두루 볼 수 있다. 특히 동쪽 방면의 산맥이 빚어내는 겨울산의 그라디에이션이 일품이다. 이런 풍광을 보면서 성벽을 한 바퀴 돌면 어느덧 고뇌의 끈이 풀려있을 것이다.   


   


내려오면 꼭 거쳐야 할 의식이 있다. 고된 성돌이를 함께 한 일행과 함께 닭백숙을 먹어주는 일이다. 나라의 굴욕과 인생의 쓴맛을 곱씹으며 성곽길을 돌고 나서 게걸스럽게 닭백숙이 웬 말이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먹어주다. 나중에 꽤 생각난다. 먹을 수 있을 때 먹어줘야 한다. 청나라 군사에 맞서 최후의 일전을 준비하며 육신을 다잡기 위해 먹었던 조선 장수처럼 든든히 먹어줘야 한다. 그것이 남한산성의 법칙이다.      


마무리는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이다. 다 읽지 않아도 좋다. 처음 스무 장 정도만이라도 읽자. 읽었더라도 다시 읽자. 지나온 길의 의미가 되새김질될 것이다. 더불어 지나온 인생도 되돌아보게 될 것이다. 삶이란 그렇게 지는 것에 익숙해지는 과정이기에. 혼자 걷고, 혼자 생각하는 길, 그 길이 바로 남한산성 성곽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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