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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재열 여행감독 Jun 13. 2021

소설가가 아닌 여행가로서의 김훈

그는 탁월한여행가다.


소설가 김훈 선생은 내 결혼식 주례를 서주신 분이다. 보통은 대학교 은사에게 주례를 부탁하곤 하는데 은혜를 입었다는 생각이 드는 스승도 없었고, 그때나 지금이나 윗사람한테 귀염성 있는 스타일이 아니라서 주례를 부탁할 만큼 가까운 모교 교수가 없었다. 그때 회사의 연장자인 김훈 선생에게 주례를 부탁했고 흔쾌히 응해 주셨다.      


주례사도 다른 원고처럼 연필로 꾹꾹 눌러서 써 오셨다. 다소 고답적인 내용이었는데 한 줄로 요약하면 ‘결혼이란 물적 토대를 공동으로 구축하는 일이다’라는 것이었다. 열심히 돈벌이를 하라는 얘기였다. 돌아보니 주례사에 충실하지 못한 결혼 생활이었다. 파업에 창간에 다시 창업까지(심지어 창직), 철이 들 겨를이 없었다. 아직까지 내 집 마련도 못했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소설가 김훈’이 익숙하지만 나에게는 ‘저널리스트 김훈’이 더 친근하다. 그래서 아직도 ‘김훈 국장’이라고 부른다. 시사저널 파업 때 그가 우리를 위로하기 위해 찾아왔을 때 했던 이야기가 기억난다. 비록 ‘짝퉁 시사저널’이 발행되고 있지만 정통성은 우리에게 있다고 했더니 그는 “매체의 정통성은 판권을 가진 사람에게 있다”라고 일갈했다. 정말 뼈를 때리는 ‘팩폭’이었다. 그때는 그 말이 그렇게 섭섭할 수가 없었는데 지나 보니 맞는 말이었다. 그는 응원에 취한 우리를 깨어나게 했다.    


 


시사IN 창간을 할 때 김훈 국장은 "사실을 증거 하라. 그것이 기자의 숙명이다"라는 얘기를 우리에게 주었다. 정리하면 이런 내용이었다.      


“사실에 바탕해서 의견을 만들고, 의견에 바탕해서 신념을 만들고, 신념에 바탕해서 정의를, 정의에 바탕해서 지향점을 만들라. 이게 갈 길이다.     

사실에 바탕이 없으면 안 된다. 정의부터 하면 안 된다. 저널리스트로서 평생의 고민이 이것이다. 이것을 안 하고 신념을 얘기해서는 안 된다. 사실에 입각하면 저널리즘의 살 길이 있다.     

조선일보와 한겨레는 사실이 아니라 의견에 입각한다. 사실에 입각하는 저널리즘이 등장하면 희망이 있다. 이것을 하려면 기자들이 엄청나게 일해야 한다. 사실에 대해서 탐구해야 한다.     

저널은 각개 기자의 신념을 구현하는 데가 아니고 사실을 증거 하는 데이다. 개인의 신념을 구현하려면 정당으로 가야 된다. 저널로는 오지 마라.      

평생 이 생각을 했다. 이게 나의 고민이다.     

편집국장은 팩트를 요구해야 된다. 이것에 대해 기자들은 일사불란하게 복종해야 된다. 이게 아니면 항명이다. 우리는 신념의 세계에서 사실의 세계로 가야 된다. 아니면 망한다. 이것을 시사IN이 해야 된다. 그게 아니면 또 하나의 조선일보나 한겨레가 된다.     

내가 기자로서 배운 것은 사실의 존엄이다. 사실은 정치권력을 가진 놈도 박해할 수 없다. 그것을 입증하는 것이 기자의 사명이다.”     


이런 면에서 보면 그가 기자에서 소설가로 전업한 것이 이해가 간다. 그는 신념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소설가가 된 셈이다. 기사와 달리 소설은 상념의 상찬이었다. <칼의 노래>를 읽으면 ‘이순신의 탈을 쓴 김훈’이 보였다. <남한산성>을 읽으면 ‘인조의 탈을 쓴 김훈’이 나타났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풀어내기 위해 저널리즘을 벗고 소설을 입었다.    


 


다시 여행감독이 되어 김훈을 읽으니 이번에는 여행가 김훈이 보인다. 생각해보니 그는 르포르타주 기사의 끝판왕이었다. 르포르타주는 바꿔 말하면 ‘저널리즘적 여행기’라 할 수 있으니 그는 탁월한 여행작가였던 셈이다. 그의 소설은 역사 르포르타주의 성격을 가지는데 대부분 취재 여행이라는 선행 작업이 있다.       


그의 에세이 <자전거 여행>을 읽다 보면 흥미로운 내용을 발견할 수 있다. 진도 편을 읽으면 <자전거여행>에 이미 그의 소설 <칼의 노래>가 들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앞서 지적했듯이 <칼의 노래>는 빙의다. 이순신의 탈을 쓴 김훈이 임진왜란을 체험하고 있다. <자전거 여행>에서도 그 빙의를 볼 수 있다. 답사를 통해 역사를 온몸으로 체험한 후 그는 역사를 몸으로 삼켜냈다.      


얼마 전 경기아트센터의 인문 콘서트 섭외를 위해 김훈 국장을 찾아뵈었다. “52살의 여름에 김훈은 겨우 쓴다”라고 <자전거 여행> 서문에 썼는데, 73살의 김훈도 겨우 쓰고 있었다. 문장에서 수식어를 아끼고 주어와 술어만으로 쓰려하듯이 그의 삶도 단순 질박했다. 스탠드 조명을 분산하려고 걸쳐둔 손수건 외에는 서재에 어떤 장식도 없었다. 여전히 큰 사전들은 펼쳐져 있었고 전집은 가지런히 꽂혀 있었다.      


겨울에 찾아뵈려고 했는데 몸이 안 좋다고 하셔서 한 계절이 늦춰졌다. 다행히 회복되었다고 하신다. 소설 집필로 이어지는 그의 여행에 관한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그의 소설은 이 글을 왜 써야겠다고 생각했는지가 명징하게 드러난다. 그래서 독자도 그의 글을 왜 읽어야겠다고 생각하는지가 명확하다. 그 이야기를 복기해보고 싶었다.      


분류하자면 그는 충동적 여행가에 속한다. 마음 착한 후배를 운전병으로 차출해 울진에 간다. 이유는 ‘그 집 겉절이가 생각난다’는 것이다. 겉절이만 주문할 수 없으니 대게도 함께 주문했다고 능청을 떨며 “사람들은 대게를 먹으러 울진에 가지만 나는 겉절이를 먹으러 간다”라고 허세를 부린다.      


충동적 여행가들은 대부분 자존감이 높은 사람들이다. 남이 뭐라든 제 갈 길을 간다. 자기 자신이 중하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겉절이여행’은 가장 김훈다운 여행이다. 울진에 가면 뭘 먹어야 하고 어딜 가야한다고 사람들이 지껄이건 말건, 내가 만족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앞뒤 보지 않고 그곳으로 직진한다.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여행 수다’가 되었다. 최근에 가본 풍도 이야기를 했더니, 풍도 앞바다에서 벌어졌던 청일전쟁 이야기를 하셨다. 풍도 인근에서 청나라 수병들이 몰살되어 풍도에 그를 기리는 자취가 있다고 조만간 풍도에 모시고 가서 보여드리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흑산도의 사리마을에 유배석이 있어 유배자들 죄명이 적혀 있는데 ‘해괴한 짓’이라는 죄명으로 유배 온 궁녀가 있었다고 하니, 실록에 기록된 궁중 간통 사건을 바로 기억해 내신다. 매향리 미군 사격장을 막아낸 전만규와 열화우라늄탄 이야기에서, 정선 덕산기 계곡에 산적처럼 살고 있는 예술가들 이야기로, 이야기가 산을 넘고 물을 건넜다.      


“운전은 직접 하고 다니느냐”라고 물으시는 것을 보면 조만간 운전병으로 징발하실 것 같다.

풍도행 티켓을 곧 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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