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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이즈 Mar 18. 2022

혀의 기억

김애란 작가의 '침이 고인다'를 읽고

1.

혀는 기억한다. 

머리보다 오히려 확실히 기억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왜 내가 며칠 동안 김치를 먹지 못하면 환장을 하겠는가?', 우리는 아마도 다른 어떤 기억보다 혀의 기억에 많은 빚을 지고 살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추억은 다름 아닌 '혀의 기억'인 경우가 많으니까.


2.

초등학교 6학년 여름, 학교에서 소풍을 갔다. 준비물은 김밥이었다. 소풍 며칠 전 엄마에게 곧 소풍이니 날짜에 맞춰 김밥을 싸 달라고 했다. 난 소풍 전날 일찍 잠들었다. 아침에 일어나 허둥지둥 준비를 하고 엄마가 싸준 김밥을 들고 집합장소로 갔다.


소풍 장소는 산과 숲 그리고 강이 어우러진 캠프촌이었다. 오전 활동을 마치고 각 조로 나누어 텐트를 배정받았다. 각 조는 5명씩 남학생과 여학생은 분리되어 있었다.


곧 점심시간이었다. 배낭을 열어 아침에 가져온 도시락 뚜껑을 열어보니 김밥에 커다란 단무지만 들어있었다. 갑자기 내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부끄러운 마음에 난 뚜껑을 닫고 도시락을 다시 배낭에 넣었다.


친구들 김밥은 형형색색이었다. 어떤 김밥은 소고기가 들어있고, 어떤 김밥은 참치와 스팸도 들어있었다. 시금치, 우엉, 단무지가 오색찬란하게 반짝거렸다. 또 반찬으로 계란말이와 줄줄이 비엔나도 있었다. 아무도 내가 김밥을 싸왔는지 아닌지 관심이 없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도시락을 한 곳에 모아 함께 먹었다. 나는 조용히 친구들이 싸온 김밥과 반찬을 먹었다.


오후 활동이 끝나고 선생님들이 해주는 저녁을 먹었다. 저녁을 먹고 장기자랑 시간이었다. 시간은 금세 지나갔다. 각 조는 삼삼오오 텐트로 이동했다. 텐트 안에 5명의 아이들이 누웠다. 그리 쉽게 잠을 잘 수 없었다. 한 아이가 장난을 치면, 다른 아이가 또 장난을 받았다. 한 동안 이런저런 장난을 하다 보니 시간이 또 까무룩 흘렀다.


한 친구가 말했다. “배고프다.” 난 잠시 고민을 하다 친구에게 말했다. “엄마가 싸준 김밥이 있는데, 단무지만 들어있어. 먹을래?” 친구들은 일제히 “먹자~!”하며 신나 했다.


배낭에서 도시락통을 빼내 뚜껑을 열었다. 노란 단무지가 중앙에 큼직하게 자릴 잡고 있었다. 한 친구가 잽싸게 손을 내밀어 김밥을 입으로 가져가 오물거렸다. “와! 맛있다.” 다른 친구들도 한 입씩 김밥을 가져다 먹더니, 모두 “진짜 맛있는데!”하며 감탄했다. ‘에이~ 설마’하는 마음으로 나도 김밥을 한 개 집어 입으로 넣고 오물거렸다.


단무지의 달고 짭짜름한 맛과 쌀밥의 고소함, 그리고 김에 발라진 참기름 맛의 조화가 일품이었다.


순식간에 김밥은 나와 친구들의 위장으로 사라졌다. 친구들은 이구동성으로 내게 “너네 엄마 김밥이 제일 맛있다.”라고 말하며 엄지를 세웠다.


소심한 어린 남자아이의
치기 어린 부끄러움이 단무지 하나로
김밥계를 평정한
엄마 요리 솜씨에 대한 자부심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3.

김애란 작가의 '침이 고인다'를 읽으며 실제로 침이 나왔다. '인삼 껌'이라는 한국인만 이해할 수 있는 단어는 내 혀의 기억을 자극했다. 그 맛에 대한 상상만으로도 침샘은 마치 자유의지를 지닌 것을 증명하려는 듯 폭발했다.


침샘은 결국 감자칩으로 이어지고, 감자칩은 맥주를 불러왔다. 맥주는 2캔이 되고, 3캔이 되었으며 더불어 소금기가 짭조름한 반달 같은 땅콩을.


땅콩을 오물오물 씹다가 뜬금없이 단무지가 떠올랐다. 단무지는 기어코 초등학교 6학년 소풍 때, 엄마가 싸준 김밥을 추억하게 했다.


그 맛이 지금도 내 혀의 기억 속에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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