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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이즈 Mar 22. 2022

세번의 행운 2

사람들은 ‘행운’을 늘 ‘하늘’에 빈다.


그러나,

나에게 ‘행운’은 언제나 ‘사람’이었고, ‘인연’이었으며, ‘사랑’이었다.


1.

12월의 어느 날이었다.

하늘은 캄캄했고, 때아닌 겨울비가 내렸다.


사장님이 말했다.

“이 우산을 쓰고 여기서 저기까지만 걷자.”


내가 대답했다.

“네.”


2.

2004년 1월.

무사히 군복무를 마쳤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새롭게 생긴 건물 옥상에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중국어언학원’이라고 흰색 바탕에 붉은색 글씨로 쓰여있었다.


집에 돌아온 다음날 난 중국어학원에 등록했다.


내가 중국어를 공부하겠다는 결심을 한 이유는 단순했다.


첫 번째 이유는 군 시절 내 후임이 ‘중문과’였던 것이다.


후임에게 물었다.

“밥 먹었니? 는 중국어로 어떻게 말해?”


후임은 유창한 중국어로 대답했다.

난 중국어를 할 줄 아는 후임이 멋져 보였다.


두 번째 이유는 나중에 만약 내가 아버지가 된다면, 외국어 하나쯤은 유창한 그런 멋진 아버지가 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20대의 난 참 이상한 로망이 있었다.


3.

중국어 학원은 북경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선생님과 중국인 선생님 두 분이 운영했다.

기초회화 수업은 한국인 원장님이 하셨다.


원장님의 수업 방침은 단순하고 명확했다.

“중국어는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입의 근육을 훈련하여 습관화시키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중국어 수업시간은 활기 넘쳤다.

큰소리로 말하면 칭찬을 받았다.


군대를 다녀온 것이 아주 많은 도움이 되었다. 큰소리로 말하는 것은 자신 있었다.


원장님께 중국어를 처음 배우게 된 것이 나의 첫 번째 행운이었다.


중국어학원을 다닌 지 반 년정도 지날 무렵,

내가 가르치던 학생의 부모님의 사정에 의해 과외를 중단하게 되었다.


원장님께 학원을 그만둔다고 하자, “왜?”라고 물으셨다.


내가 “학원비가 없어서요.”라고 답하자,


원장님은 “그냥 다녀. 이것도 교육사업인데 너한테 장학금 준다고 생각해”라고 하셨다.


원장님의 쿨함 덕분에 내가 중국어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다.


4.

매일매일 학교를 통학하는 길을 걸으며,

입으로 중국어를 중얼거렸다.


‘이, 얼, 싼, 쓰…..’하며 걸었다.


중국어는 성조가 있는 언어이기 때문에 ‘성조’가 참 어려웠다.

특히 2성을 발음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종종 원장님이 나를 보며 안쓰러워했다.


믿어지지 않겠지만,

그리고 TMI일 수 있겠지만,

난 좀 음치다.


5.

중국어 공부를 시작한 지 5개월 정도가 되었다.

대학교 게시판에 중국 단기 어학연수 장학생 선발에 대한 공고를 보았다.


마음이 떨리기 시작했다.

‘나도 외국에 유학을 갈 수 있지 않을까?’라는 ‘꿈’이 뭉실뭉실 피어났다.


열심히 준비하고 치른 시험.

결과는 ‘불합격’이었다.


불합격 통보는 예전에도 경험한 적이 있었지만, 그래도 마음이 좋지는 않았다.

그러나, 내 실력이 모자란 것을 인정했고, 더 열심히 중국어를 공부하겠다고 결심했다.


6.

대학교 2학년으로 복학한 나는 장학금을 받았지만, 생활비를 학교에서 지원해주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과외를 했고,

과외비를 받아서 중국어 학원을 다녔다.


그러나 과외비로는 생활비가 전부 충당되지 못했다.

난 아르바이트를 하기로 결심했다.


처음 면접을 본 곳은 편의점이었다. 편의점 사장님께서 내게 내일 결과를 알려준다고 하셨다.


그래서 난 시내에 있는 브랜드 옷 매장에 면접을 보러 갔다.


브랜드 매장의 사장님은 단박에 ‘합격’이라며, ‘내일부터 출근해’라고 하셨다.


그래서 난 브랜드 옷 매장에서 알바를 시작했다.


편의점 면접 결과는 어떻게 되었냐고?


다음날 연락이 왔다. ‘합격’이라고 했다.


난 이미 다른 곳에 알바를 구했기 때문에 정중히 거절한다고 말했다.


편의점 사장님이 매우 몹시 ‘아쉬워’ 했다.


7.

여름 방학 내내 브랜드 매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브랜드 매장의 아르바이트는 아침 9시부터 저녁 7시까지였다.


일이 끝나면 바로 중국어 학원으로 갔다.

과외가 있는 날은 과외도 했다.


매장의 제품은 양복을 포함한 남성복과 여성복, 그리고 지갑과 벨트 등의 액세서리도 있었다.

처음 내가 한 일은 제품에 대한 파악이었다. 가장 어려운 제품은 양복이었다.


그래서 양복은 언제나 직원 형님이 도맡아 판매했다.


나는 일을 눈치로 배웠다.

어떻게 파는지? 손님에게 어떻게 영업을 하는지? 또 제품을 어떻게 설명하는지 자세히 보고 들었다.

창고의 재고도 항상 파악했다.


열심히 고객에게 설명하고 고객이 구매의사를 표현했는데,

사이즈가 없어서 못 팔게 되는 일을 겪으며,

창고 재고 파악의 중요성을 실감했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일이 눈과 손에 익기 시작했다.


매장으로 들어오는 손님에게 자신 있고 예의 있게 인사했다.

그리고 손님에게 물었다.


“어떤 제품을 찾으십니까?”


손님은 웃으며 남편이 입을 바지를 찾는다고 답한다.


“사이즈가 어떻게 되시나요?”


손님은 대부분 32-34 사이즈라고 답한다.


머릿속에 재고를 정확하게 알고 있던 나는 남성 바지 중 사이즈가 있는 바지를 손님께 권한다.


“이 제품이 저희 매장에서 가장 잘 팔리는 히트상품입니다.”

“한 번 입어보시겠습니까?”


손님 뒤로 멀뚱히 쫓아 들어온 남편에게 손님이 ‘입어봐’라고 지시한다.


브랜드 옷이 좋은 이유는 입으면 다 좋아 보인다는 점이었다. 또한 입게 된 번거로움을 경험한 남편은 다른 것을 별로 입어보고 싶지 않은 눈치다.


“사장님께 정말 잘 어울리십니다. 마침 사장님 사이즈의 재고가 딱 한 벌 남았습니다.”


8.

옷가게 매장에서 일했던 에피소드는 참 많다.


난 매장에 들어온 손님에게 평균적으로 1분 정도만에 한 벌의 옷을 팔았다.


어떤 여성 손님은 얼굴이 붉게 익으면서 옷을 사기도 했다.

왜 얼굴이 붉어진 건지는 잘 모르겠다.


물론 그런 손님에게 제품을 파는 것의 문제는 다음날 반품이 들어온다는 것이었다.


매장에 들어오지 않는 손님에게는 당연히 팔 수 없다.

그래서 나는 매장에 들어온 손님이 필요한 것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그것에 맞는 제품을 제안하기 위해 노력했다.

중요한 점은 사이즈가 있는 제품을 제안하는 것이었다.


여름방학이 끝날 무렵 아르바이트도 그만두었다.


사장님은 나에게 아르바이트비에 인센티브를 듬뿍 얹어주었다.

물론 인센티브 조건은 내가 처음 면접 볼 때, 사장님께 먼저 제안한 것이었다.

당시의 난 일을 잘하면, 당연히 그에 상응하는 보상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감사하게도 사장님은 그렇게 해주셨다.


사장님을 만난 것이 내 두 번째 행운이다.


9.

2학기가 되었다.

꾸준히 공부한 중국어 실력은 노력과 비례하여 꾸준히 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게시판 공고를 보게 되었다.

1년 동안 장기로 중국에서 교환학생으로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는 시험일정이었다.


중국어를 더 열심히 공부했고, 중국어 면접을 위해 정말 중국어를 달달달 외웠다.

시험을 치르고, 면접을 보는 시간이었다.


중문과를 부전공으로 선택했기에 안면이 익은 북경외대에서 ‘교환교수님’으로 우리 대학에 와 계신 중국인 교수님과 교환학생 선발의 책임을 맡은 교수님 두 분 앞에서 중국어로 자기소개를 했다.


그리고 교수님의 질문에 대답했다.

교수님이 하신 질문도 내가 한 대답도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는다.


다만,

내가 질문에 대답할 때 교수님께서 내 눈을 아주 똑바로 주의 깊게 바라보셨던 것은 기억한다.


이때 면접관으로 교수님을 만난 것이 나의 세 번째 행운이었다.


결과적으로 난 ‘합격’했다.


나중에 중국인 교수님을 통해 전해 들었다.


당시 면접관 교수님께서 성적과 상관없이 꼭 교환학생으로 보내고 싶은 학생이 있다고 아주 강경하게 전체회의에서 말씀하셨다고 했다.


그 학생이 바로 ‘나’였다.


그래서 난 중문과가 아닌 ‘타과’에서 1년 장기 교환학생으로 선발된 우리 대학 최초의 학생이 되었다.


10.

교환학생이 합격되자 이제 다른 문제가 생겼다.

비행기표를 사야 했고, 체류하는 경비를 마련해야 했다.


교환학생 합격은 오히려 내게 큰 압박이 되었다.


소식을 전해 들은 고등학교 3학년 담임선생님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과외할 학생들 모집해줄게. 니 후배들 가르쳐라. 그럼 좀 도움이 될 거야.”


난 내 후배 5명의 과외를 하게 되었고, 과외비를 차곡차곡 모았다.


그리고 2번째 행운의 사장님께 전화가 왔다.

“행사를 일주일 정도 해야 되는데 와서 해줄래? 아르바이트비 넉넉히 챙겨줄게”라고 하셨다.


내가 참여한 행사라는 것은 바로 브랜드 매장 옷의 겨울옷 이월상품을 정리하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매일매일 바글바글 모여들었다.


사장님과 나 그리고 한 명, 셋이서 행사를 맡았다.

다른 한 명은 누군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정말 미친 듯이 팔았다.

소리를 고래고래 질러서 매일매일 목이 쉬었다.

정말 혼신의 힘을 다해 팔았다.


사장님과 참 팀워크도 잘 맞았다. 일을 정말 잘하시는 분이었다.


행사 내내 사장님은 내게 자양강장제, 마늘즙 등 온갖 보약 같은 것을 가져다 먹이셨다.


그리고 행사에 나온 겨울 거위털 파카 몇 벌을 교환학생 가서 입으라며 챙겨주셨다.

물론 아르바이트비는 '아르바이트비가 아닌 것'처럼 챙겨주셨다.


행사의 마지막 날이 되었다.


11.

겨울비가 내렸다.

해가 떨어져 온 세상이 캄캄했다.

아마도 저녁 무렵이었다.


행사장 주차장에서 사장님과 커피를 한 잔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장님이 말했다.

“이 우산을 쓰고 여기서 저기까지만 함께 걷자. 난 그거면 돼.”


내가 말했다.

“네.”


비는 검은색 우산에 내렸다.

우산 아래의 두 사람은 비를 맞지 않았다.


12.

'행운'을 사람들은 하늘에 빈다.


나에게 있어 '행운'은 언제나 ‘사람’이었고,

‘인연’이었으며,


‘사랑’이었다.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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