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와 그녀
1.
그녀를 좋아했다. 아니 사랑했다. 교단 위에 선 그녀를 숭배했다. 열 살의 나이차이는 극복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스물 일곱 초임 교사로 실업계 고등학교 2학년 담임으로 발령받은 그녀는 반짝거렸다. 별처럼, 파도에 되비춰진 물빛처럼. 수업 중 그녀는 가끔 교단에서 내려와 에나멜 구두를 또각거리며 책상 사이를 걸었다. 그녀가 지나가면 봄꽃향기가 따라왔다.
실업계 고등학교 남학생들은 초임 교사인 그녀에게 흠모의 마음을 품은 쪽과 어린 남자의 치기를 유감없이 발휘하는 두 무리로 나누어졌다. 난 흠모하는 쪽이었다. 흠모의 마음은 소년이 막 남자로 성장하기 시작하는 알 수 없는 카르마로 인해 열정으로, 격정으로, 갈망으로 변해버리기 일쑤였다.
2.
그녀가 이사를 한다고 했다. 이사를 도와줄 지원자를 모집했다. 당연히 난 적극적으로 하겠다고 손을 번쩍 들었고, 몇몇 친구들도 동참했다. 그중 평소에 그녀에 대해 탐탁하게 여기지 않던 J도 지원했다. 그는 항상 내게 그녀의 나쁜 점을 말했다. 수업 실력에 대해, 그날 입은 옷 센스에 대해, 성격에 대해, 심지어 수업시간에 엉뚱한 질문을 하여 그녀를 당황시켜 얼굴을 붉게 만들기도 했다. 그가 참여한다고 하니 의아했지만, 나와 가장 친한 J가 함께한다는 것은 기쁘고 고마웠다.
J는 그녀의 이사에 누구보다 열심히였다. 키도 크고 힘도 좋아 무거운 물건도 혼자 거뜬하게 옮겼다. 쉬지 않고 이삿짐을 나르는 그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고, 그녀는 J에게 “쉬엄쉬엄 해”라며 미소를 지었다. 얼음물도 J에게 가장 먼저 마시라고도했다.
짐을 다 옮기자 그녀는 “정말 고생했어. 얘들아. 정리는 내가 하면 되니까 우선 맛있는 것 사 줄 테니 먹으러 가자.”라며 말했다. 그녀의 차를 타고 시내에 있는 닭갈비집에 도착했고, 우리들은 걸신들린 강아지처럼 허겁지겁 젓가락을 움직였다. 그녀는 “천천히 먹어. 얘들아. 부족하면 더 시켜줄게”라고 말하며 닭갈비를 추가로 주문했다. 잠시 후 그녀는 조용히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급하게 먹어서였을까? 갑자기 배가 아파왔다. 내가 화장실에 가려고 일어서니 J도 따라 일어섰다. 화장실은 남녀공용이었는데, 우리가 문을 열고 들어가자 그녀가 화장실에서 나오고 있었다. 그녀가 화장실에서 나가고 난 후 J가 말했다. “아씨! 냄새 아주 구려.” 내가 J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 너무 좋은 향기다” J는 나에게 손가락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3.
J는 좀 유별났다. 하긴 그가 유별났다면 그와 가장 친했던 나 역시 유별났겠지. 아무튼 J는 좀 특이하기는 했다. 김치를 혐오했고, 한일전 축구경기는 일본을 응원했으며, 길을 걷다 뜬금없이 고성방가를 하기도 하고, 길에 핀 코스모스를 뚫어져라 한참 동안 바라보기도 했다. “뭐 해?”라고 물으며 대답 없이 눈짓으로 나에게도 코스모스를 바라보게 만들고야 말았다. 물론 고성방가도 혼자 할 수 없다며 기어코 날 끌어들였고.
한 번은 J에게 물었다. “넌 왜 일본을 응원해?” J는 갑자기 진지한 표정으로 내 눈을 깊이 바라보며 “축구는 스포츠일 뿐이야. 그리고 스포츠 경기에서 어느 쪽을 응원할지는 내가 어느 나라 사람인지로 결정될 문제가 아니라 내가 어느 팀을 더 응원하고 싶은지로 결정할 문제야. 난 오히려 한국사람이라고 한국팀을 반드시 응원해야 하는 이유를 납득할 수가 없어.”라고 했다. 또 J에게 “그럼 김치는 왜 싫어해?”며 묻자 “마찬가지야. 김치 맛이 그냥 싫어. 한국 사람이라고 꼭 김치를 좋아해야 하는 법은 없잖아. 입맛은 그저 취향일 뿐이니까.”라는 대답이었다. “코스모스는 왜 그렇게 뚫어져라 본거야?” J는 “너무 이뻐서”라고 말하며 웃었다.
고성방가를 왜 하는지는 J에게 묻지 않았다. 나도 해보니 왜 하는지 이해가 되었으니까. 가슴이 시원하게 뻥 뚫리는 것 같았으니까.
4.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고등학교 2학년 겨울방학이었다. 겨울방학이라고 별다른 계획도 갈 곳도 없었다. 자취방에 눕고 엎드리고 그저 뒹굴뒹굴이었다. J는 벌써 고향으로 내려가 방학을 보내고 있었다. 난 앉은뱅이책상에 앉았다. 그녀에게 편지를 쓰기 위해서. 편지를 한 통 썼다. 그녀에게 보냈다. 그녀가 그리웠다. 매일매일 그녀가 보고 싶었다. 꿈에서라도 그녀를 볼 수 있길 간절히 희망했다. 꿈에서라도 그녀의 손을 잡을 수 있길, 그녀와 하나가 될 수 있길 바라고 바라고 바랐다. 또 편지를 썼다. 또또 편지를 썼다.
겨울 방학이 얼마 남지 않은 어느 날 꿈을 꿨다. 그녀가 나왔다. 그녀가 나왔기 때문에 꿈이라는 걸 알았다. 꿈이지만 그녀가 있었기에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녀를 보고, 보면서도 또 보고 싶었다. 꿈에 영원히 머물 수만 있다면. 결국 꿈에서 만난 그녀와 제발 영원히 함께할 수만 있다면 하며 바라고 바랐다.
삐삐가 울렸다. 공중전화로 후다닥 달려가 음성메시지를 들었다. 그녀 목소리였다. 날 만나자고 했다. 점심을 사준다고 했다. 기쁨이 벅차올라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일분이 일초가 정지된 듯 천천히 흘렀다. 그녀를 만나려면 내일이 와야만 했다.
5.
그녀가 말했다. “난 네가 대학에 갔으면 좋겠어. 선생님을 위해 그렇게 해줄래? 선생님이 입시학원 학원비를 대줄게.” 난 일초의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네. 꼭 그렇게 하겠습니다.”
내가 생각하고 상상하고 꿈에 그렸던 장면은 없었다. 손을 잡지도, 포옹을 하지도 못했다. 그러나 그녀와 만났고, 약속했다. 할 수 없다고, 자신 없다고, 난 대학에 갈 경제적 능력이 없다고, 공부를 하려면 돈이 필요하다고, 난 과거에 어떤 일에 성공했던 경험이 없다고 등등의 수많은 핑계를 뒤로하고 약속했다.
‘나 ego’를 감싸고 있는 이 ‘알 egg’을 깨뜨린다고. 기필코 알을 깨고 나와 새가 되고, 바다가 되고, 세계가 되겠다고.
6.
J에게 말했다. 그녀가 내게 대학에 가라고 했다고. 이제부터 난 대학입시 공부를 할 거라고. 공부만 할 거라고. 공부하는 기계가 될 거라고. “그래라.” J는 내 예상과 다르게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그때부터였을까? J와의 시간은 점점 줄어들었다. 학원에서 공부하고, 독서실에서 공부했다. 더 이상 고성방가도 길가의 꽃도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영어사전과 수학의 정석이 오히려 J보다 나와 각별해졌다. 어느 날 문득 교실에서 바라본 J의 옆모습이 낯설었다. “J야.”하며 내가 반갑게 말을 건네도 차갑디 차가운 시선만 잠시 내게 머물 뿐이었다.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7.
교내 작문대회가 있었다. 주제는 우정이었다. 우정에 대한 당시의 내 마음을 그대로 쏟아냈다. 쏟아내고 잊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가 결혼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결혼을 하고 학교도 그만둔다고 했다.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내 마음은 갈 곳을 잃은, 주인을 잃어버린 강아지처럼 허둥거렸다. J가 오랜만에 내게 다가와 친근한 눈빛으로 말했다. “우리 이따가 선생님 집에 찾아가자.”
그녀의 집은 생각보다 멀었다. J와 나는 그녀의 집을 향해 걸었다. 길치인 난 도저히 찾아갈 수 없었겠지만 J는 한 번 가본 길은 정확하게 기억하는 나침반 같은 녀석이었다. 두 시간, 두 시간 반을 걸었을까. 저녁은 이미 깊은 밤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J가 “여기다.”하며 초인종을 눌렀다. 문 안쪽에서 “누구세요”하며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현관문을 열고 땀에 젖어 있는 두 제자를 보고 “너네 왠일이야? 우선 들어와. 마실 것 좀 줄게.”하며 안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그래. 여기는 어떻게 왔어.”그녀가 묻고, “답답한 마음에 걷다 보니 선생님 집 근처라는 걸 알고 혹시 택시비라도 구해서 집에 돌아갈 수 있을까 싶어서요.”라며 J가 답했다. 그녀는 웃으며 “못 말린다. 우선 시원하게 음료수나 한 잔 해. 이따 택시비 줄 테니까.”라고 말했다.
음료수를 마시니 몸에 흐르던 땀이 식었고, 마음도 많이 가라앉는 듯했다. 그녀는 뭔가 떠오른 듯 안방으로 들어갔다 손에 쪽지를 들고 왔다. ‘우정은 동성 간의 사랑이다’라고 그녀의 필체로 적힌 쪽지를 내게 내밀며 말했다.
“이 문장 네가 쓴 거 맞지? 이번에 교내 작문대회에서 네가 쓴 글인데 너무 인상적이어서 메모지에 적어두었다가 결혼할 사람에게 이야기했더니 베낀 거 아니냐고 하더라고. 고등학생이 이렇게 깊이 있는 문장을 쓴다는 게 놀랍다고.”
8.
그녀의 결혼식날이었다. J와 함께 결혼식장에 찾아갔다. 그녀는 태양처럼 빛났다. 마치 세상에 그녀만 존재하는 것처럼.
결혼식 후 소문처럼 그녀는 학교를 그만두었다. 더 이상 그녀를 학교에서 만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와의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했다. 공부했다. 열심히 공부했다. 대학에 불합격했다. 재수생활을 시작했다. 열심히 아주 열심히 공부했다. 결국 대학에 합격했다.
대학생이 되었다. 재수생활 동안 고등학교 친구들을 포함하여 어떤 친구와도 연락을 하지 않았다. 공부만 했으니까. 당연히 J와의 연락도 끊어졌다. 그가 대학에 갔는지 어떤지 알 수 없었다. 그녀 역시도 선생님을 그만두었기 때문에 감사인사조차 찾아가서 드릴 수가 없었다. 내 기억에서 J도 그녀도 점점 흐릿해지고 있었다.
9.
그러던 어느 날. 봄날의 따사로운 햇빛이 반짝이던 어느 날. 봄향기가 만발하던 어느 날. 우연히 길에서 그녀를 만났다. 마치 어제 만났던 사람처럼 서로를 알아보았다. 그녀와 함께 차 한 잔을 마시게 되었다.
“선생님. 저 대학 합격했어요.”
선생님은 연신 잘됐다며 눈물을 흘리셨다. “잘됐다. 잘했다. 장하다.”
10.
‘나 ego’라는 껍질은
‘알 egg’은
언제나 사랑으로 품어져 깨뜨려진다. 내가 깨뜨리는 것이 아니다. 사랑에 깨뜨려지는 것일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