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의 다정을 사랑해

by 윤한솔

추위를 대비해 두툼한 잠바를 걸쳤지만

막상 지하철에서는 땀을 뻘뻘 흘린 어느 날이었다.

참을 수 없이 더워서 도저히 내가 내릴 역까지는 못 갈 것 같아 중간에 내렸다.

당장에 외투를 벗어 팔에 걸치고 땀에 젖은 머리를 휘휘 날리며

버스를 타기 위해 개찰구로 나섰다.


해방된 느낌에 젖어 살랑살랑 걸어가다가 우연히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주의 깊게 본 적은 없지만 늘 그 자리를 있었을 도서 대여 기계가 보였고

스마트 화면엔 마침 <H마트에서 울다>라는 책이 나오고 있었다.


여러 달 전부터 밀리의 서재에 담아뒀던 책이었다.

전자책은 서비스되지 않고 오디오북만 있길래

언젠가는 전자책도 풀리려나 하고 기다리기도 하고

막상 서점에 가서는 사는 것을 잊기도 한 바로 그 책이었다.

버스 시간도 좀 남았고 지갑에 통합 도서 대여 카드도 있어서

냅다 스마트 화면을 터치했다.


그런데 웬걸.

인기도서라고 스마트 화면에서 자랑만 하는 게 아니라

당장 대여할 수 있는 상태였다.

신나면서도 급한 마음으로 대여하기를 눌렀다.

그렇게 나는, 공공장소임에도 기어이 엉덩이를 씰룩이게 만드는

뜻밖의 기쁨을 만났다.


하지만 책을 대여하는 사이 내가 타야 할 버스는 이미 지나가 버렸다.

다음 버스까지는 14분여가 남았고 밖은 추웠다.

땀을 한 바가지 흘리고 나서 맞는 찬바람이라 더욱 차게 느껴졌다.


에라 모르겠다 택시를 잡고, 택시 역시 한참 기다렸다 탔다.

그리고는 어둠에 가려 잘 보이지도 않는 활자를

차창 밖으로 지나는 가로등 불에 이리저리 비춰 읽어가며 집에 다다랐다.


가방을 들고 나가지 않았던 터라 두 손은 가벼웠다.

우연히 내 손에 쥐어진 읽고 싶던 책 한 권.

그 한 권만 달랑 손에 들고 집으로 돌아오던 길.

그것은 일기에도 꾹꾹 눌러쓸 만큼 오래 기억하고 싶은 것이었다.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은 몽글해지는 순간은 더러 있다.

큰 행복이나 작은 행복을 자주 느끼며 사는 건 아니지만

그럼에도 분명하게 다가오는 순간이 있다.

내가 작은 다정을 베풀었을 때와

타인의 커다란 친절을 건네받았을 때.


얼마 전 택시를 탔을 때는 집에 거의 다 와 갈 때쯤

택시 기사님께서 갑자기 마스크를 하나 주셨다.

너무 친절한 아가씨라 고맙다고, 줄 게 이것밖에 없다고 하셨다.

별로 한 건 없었다.

택시에 타고, 늘 그랬듯이 ‘안녕하세요, 잘 부탁드립니다.’

그게 전부였다. 기사님은 그게 참 고마우셨나 보다.

따뜻한 말을 듣는 순간 난 두둥실 떠올랐다.


어느 아침엔 카페로 향하는데

문을 거의 다 열고 몸이 다 빠져나온 아저씨가

내가 잘 들어갈 수 있게끔 문을 끝까지 잡아주셨다.

난 이어폰이랑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말은 못 하고 꾸벅 인사를 드렸다.

이런 때도 역시나 몽글해지는 순간.


원래는 낯간지러워하던 새해 복 많이 받으시라는 말도

올 초에는 여기저기 뿌리고 다녔다.

편의점 사장님, 회사 엘리베이터에서 가끔 마주치며 인사 나누는

나이 지긋하신 선생님, 미화 여사님 등등

내 말에 미화 여사님은 귀엽고도 환히 웃으시며

고맙다고, 우리 예쁜 아가씨도 좋은 일 있기를 바란다고

더 감동적인 말로 되돌려 주셨다.


나는 대개 모나고 삐죽빼죽한 것들로 이루어져 있지만

때로는 이렇게 둥글기도 한 사람이다.

말 한마디의 중요함을 알고

단어 하나의 소중함을 알고

서로 주고받는 언어의 온도에 이내 체온을 맡길 수 있는 사람.

사람을 싫어하지만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을 좋아해서 싫어하지만 싫어해서 좋아하는

복잡하고도 단순하면서 쉽게 곁을 내어주지 않는 사람.

나는 그런 나의 모자라고도 살가운 다정을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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