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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란 슬픔

by 윤한솔 Jan 28. 2025

기다란 이 집에서 기다란 슬픔을 이겨낼 방법이 없었다.

해가 있을 때 불을 모두 꺼놓고 낮잠에 들었으나

눈을 떴을 땐 끝이 보이지 않는 기다란 어둠이라

엄마 찾는 아이처럼 엉엉 울어버렸다.

어둠 속에서 홀로 울었다.


네모난 집이었다면 날 둘러 안아줬을까.

이 집은 기다랗기만 해서 나를 누르기만 하는 걸까.


옷 봉지 여섯 개와 고양이 두 마리만 덜렁 데리고

이 집으로 도망치듯 이사를 왔다.

세간살이는 쿠팡으로 급하게 산 물품과

다이소에서 산 저렴한 것들로 구성되었다.

그렇게 이 집에서 2년을 살아냈다.


홀로 마신 술병으로 방 하나를 채울 수 있을 것이고

울었던 날들은 채워진 술병으로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언제든 떠날 수 있고 사라질 수 있으니

물건을 채우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한동안 이 방, 저 방을 목소리가 울리는 공간으로 내버려뒀다.

그러나 사는 것은 살아가는 것이기에

내 삶은 멈춰 있을 줄 모르고 자꾸만 앞으로 나아갔다.


읽고 싶은 책을 사고, 계절에 맞춰 이불을 사고,

버터색 티 테이블을 사고, 핑크색 소파도 샀다.

생이 채워지고 있었다.

내 공간이 되었고 애착이 생겨버렸다.

언제든 떠나버리고 사라져 버리려고 했음에도.


식구도 늘어 어느새 고양이가 세 마리가 되었다.

살아갈 이유가 늘어난 것이었다.

어느 때엔 고양이가 핑계인 척 살았다.

사실은 생을 버릴 용기가 없었고 미련이 가득했지만

그런 건 모른 척 아닌 척하고,

아무것도 모르고 남겨질 고양이를 내 생의 핑계로 삼았다.


너를 혼자 두고 갈 수 없으니 나는 차마 죽을 수 없다고.

너희 둘을 두고 갈 수 없으니 나는 기꺼이 살아가야 한다고.

너희 셋을 두고 갈 수 없으니 나는 그럼에도 숨 쉬어야 한다고.


기다란 이 집에 해가 든다.

커튼으로 가려도 기어이 비집고 들어와 공간을 밝힌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창밖으론 이름 모를 새가 날아다닌다.

실외기 위엔 통통한 거미가 언제인지 모를 때부터

같이 살고 있다.


나는 청소기를 돌리고 설거지를 하고

막힌 배수관에 용해액을 흘려보낸다.

이불을 빨아 널고 변기를 닦고

건조기에 돌린 수건을 개킨다.


그냥, 그렇게 살아간다.

원해서도 아니고

그렇다고 원치 않아서도 아닌

마지못해 그냥 그렇게 하루하루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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