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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어른

by 윤한솔

소중한 것을 만들고 싶지 않았지.

잃게 되면 날 울게 할 그런 것들 말이야.


내가 나를 잃어도 서글플 것은 없었으나

내가 나이지 못한 것에 이리도 속이 상한 채로 오래 고여 있으니

굳이 뭔가를 내 삶에 더 들여놓고 싶지 않았지.

그런 날이 오래도록 이어질 줄 알았지.

나는 나로만 아프고 싶었지.


뭔가를 제대로 가져보기도 전에 잃을 생각에 슬퍼하는 건

오래된 습관 같은 거지.

그래서 가져본 적도 잃어본 적도 없지만 서둘러 슬퍼하고

그 어떤 행동도 하지 않지.


겨우 손톱만한 나뭇잎이 매달린 아주 작디작고 연약한 가지로

내 발치에 연한 선을 그어놓고

그 선 밖으로 건너가지도 건너올 수 있게도 하지 않아.


그냥 눈만 말똥히 뜨고 지켜보는 거지.

그래 그냥 지켜보는 거야. 지켜만 봐.

그러다 닳아 없어질 것 같으면

시선조차 부담스러울 것 같으면 눈을 감고 등을 돌려.

남겨지는 것 보다 떠나는 편이 더 쉬우니까.

그렇게 언제나 떠나왔지.

부지런히 모든 것으로부터.


그리고는 다른 곳에 가서 다시 발치에 선을 긋고 빠꼼히 바라봐.

매번 처음을 반복하는 거야.

여기저기 바삐 선을 긋다보니 나는 둥그런 원 안에 갇히게 되고

때로는 조여 오는 원에 숨이 막히기도

우주만큼 넓어지는 원 안에 홀로 남은 듯 하기도 해.


아아- 제 목소리가 들리시나요?

거기 아무도 없나요?

네, 역시 아무도 없군요.

그럴 줄 알았지만 그럴 줄은 몰랐네요.


겁도 없이 뛰어 들려 했었지.

어떤 길을 택했는지도 모르고 말이야.

이상한 상태로 오래 머물다보면

이상한 건 더 이상 이상한 게 아니게 되니까.

참 이상하지.


버려지던 날, 버려지던 밤, 무기력한 옆얼굴.

다 지나버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들.

한 시절에만 머무르는 것들.

스치고 빗겨나는 것들.

의미 없음이 곧 의미인, 그 무언가의 것들.


눈을 감고도 울 수 있다는 걸 몰랐던 때가 있지.

우는 얼굴을 하지 않고도 울 수 있다는 것 역시 몰랐던 때가 있지.

그땐 그런 줄로만 알았지.

이제는 꿈에서 울어도 베갯잇이 젖는다는 걸 알게 되었지.

알고 싶지 않은 것들을 점점 알아가게 되어버렸지.

그런 어른이 되어버린 거지.


많은 일들이 나를 꿰뚫고 지나갔어.

정말이지 나를 관통했지.

가슴 한가운데 휑뎅그렁하니 구멍이 났지만

외피만은 어쩐지 견고해.

속에서부터 썩어 물러갈 뿐

외피만은 그래 어쩐지 견고하지.


다 줄 수 있다던 이들은

정작 아무것도 그 무엇도 주지 않고 떠났지만

나는 여전히 두 손을 내밀고 기다려.

착하게 기다리면 다시 와 줄 것만 같거든.

깜빡 놓고 간 나를 찾으러 되돌아 와 줄 것만 같거든.


하지만 모든 일들은 마치 그랬던 적 없는 것 같은 모양을 하고 있고

모두가 멀어지고 멀어져도 결국 나만 제자리에 남아 있어.

나는 조금씩 조금씩 서서히 서서히 빛을 잃어가고

다 식어빠진 문장만 오래도록 붙잡고

우는 듯 웃는 눈을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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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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