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좋은 선택의 연속.

by 고순


시아가 탁 트여 하늘이 잘 보이는 장소는 늘 좋다. 도시에는 높은 건물들이 많아서 그런 걸 느끼기 어렵다. 그럼에도 느낄 수 있는 공간이 몇 개 있는데 그중 하나가 문래동이다.


오늘 부천 스타필드에 가기로 했는데 마음이 바뀌어서 영등포 타임스퀘어로 향했다. 가는 길에 백화점 분위기보다 오목조목 낮은 건물들이 모여있는 문래동이 가고 싶어 다시 목적지를 틀었다. 신도림역에 내려서 문래동으로 걸어가는 길, 디큐브시티 현대백화점 1층이 공실인 게 눈에 띄었다. 아니나 다를까 현대백화점으로 가는 에스컬레이터도 진입금지로 막혀 있었다. 이제 보니 왜 죄다 공실인가 했더니 현대백화점이 폐업한 것이다.


고개를 들어 에스컬레이터 입구 쪽에 투썸플레이스 카페가 있던 장소를 쳐다봤다. 나는 작년 겨울, 그 카페에 앉아 친구랑 수다를 떨었다. 화장실을 가기 위해 백화점 건물 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니기도 했었다. 그때는 카페도 백화점도 사람들로 꽉 차 있었는데 지금은 텅 빈 건물이 돼버리다니. 저 큰 공간에 사람과 물건 하나 없는 아주 외로운 공간이 된 것이다. 자연은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으면 신비한 아름다움 만들어낸다. 하지만 인공물은 그렇지 않기에 나는 차갑고 쓸쓸한 슬픔을 느꼈다.


슬픔은 잠시뿐, 나는 문래동에 있는 양식집에 저녁을 먹기 위해 서둘러 움직였다. 식당 주문 마감이 끝나기 전에 아슬아슬하게 도착했다. 그런데 사장님이 팔 모양을 엑스 자로 만든 자세로 내게 고개를 흔드셨다. 주말인데 오더 마감을 5분 일찍 하다니 나는 아쉬운 마음을 감추며 문을 닫았다. 나는 바로 옆 골목길에 2순위로 생각해 놓은 양식집으로 갔다. 원목으로 된 인테리어와 유럽 식당처럼 식탁과 의자가 적당한 간격으로 놓여있었다. 식탁마다 작은 양초가 올려져 있었고, 한쪽 벽에는 빔프로젝터를 통해 영화 <노트북>이 소리 없이 상영하고 있었다. 아버지 뻘 정도 되는 남성분이 서빙과 주문을 동시에 하셨는데 친절한 말투와 나긋한 목소리가 듣기 좋았다.


자리에 앉아 주변을 둘러보니 소개팅하는 남녀가 많았다. 내 자리 왼쪽과 오른쪽, 두 테이블 다 소개팅하고 있었다. 오른쪽 테이블 손님이 떠나자 새로이 소개팅하는 남녀가 다시 그 자리를 채웠다. 옆 테이블 사람들의 존댓말과 적당히 어색한 분위기 그리고 처음 만났을 때 할 수 있는 질문과 조금 경직된 말투와 표정까지, 마음이 간질간질하고 설레게 만드는 풋풋함이 나에게도 느껴져 나는 작은 미소를 지었다.


"두 사람의 관계가 지속되어 더 만나게 된다면 나중에 오래된 연인이 되겠지. 지금과 전혀 다른 모습일 거야. "


이성 간의 만남에서 호감으로 그리고 좋아함, 사랑까지 단계별로 마음이 바뀌어간다. 그래서 그때 느낄 수 있는 감정들은 그때뿐이기에 소중하고 아름답다. 몇 초 지난 지금이 과거가 된 것처럼, 나는 지금의 소중한 행복을 놓치고 싶지 않아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나는 두근거림이 가득한 식당을 빠져나와 카페로 향했다. 가고 싶은 카페가 있었는데 자리가 없었다. 그다음으로 가려고 했던 카페는 영업 종료가 1시 간 채 남지 않아 마음을 접었다. 아까 전에 식당으로 가는 길에서 우연히 봤던 카페가 생각났다. 인테리어와 분위기가 마음에 들어 가보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바로 지금이었다. 나는 발걸음을 돌려 그 카페로 향했다. 다행히 자리가 있었다. 무심한 시멘트와 우드톤의 가구들 적당한 식물 조경과 전구색 불빛이 어울려 따뜻함을 내뿜고 있었다. 들어본 듯 만 듯 한 재즈 감성이 섞인 노래가 흘러나왔다. 나는 하늘이 뻥하고 뚫린 창가 자리에 앉았다. 창밖으로는 낮은 건물들이 보였고, 잎이 무성한 큰 나무가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고 있었다. 테이블 바닥은 욕조 타일처럼 하늘색 정사각형이 칸칸이 박혀있었는데 이질감이 들면서도 새로운 느낌이었다. 나는 그 위로 컵과 휴대폰, 접시를 가지런하게 칸에 맞춰 놓았다. 정갈함이 느껴져서 좋았다.


주문한 커피와 디저트도 마음에 들었다. 커피의 맛을 잘 알지 못하지만 부드러움과 고소함과 달콤함이 은은하게 느껴지는 기분 좋은 커피였다. 캐러멜 라이즈드 브리오슈라는 디저트도 시켰는데 빠삭한 빵 위에 아이스크림이 올려져 있는 간식처럼 생겼다. 캐러멜 라이즈드 브리오슈를 포크로 한 입 먹자마자 동공이 커지고 입이 열렸다. 와 맛있다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바삭함, 달달함, 꾸덕꾸덕함, 시원함이 입안에 섞여 밸런스가 딱 좋았기 때문이다. 아이스크림이 녹기 전에, 빵의 따뜻함이 사라지기 전에 나는 굶은 사람처럼 바로 다 먹어치웠다. 카페를 나오기 전에 루프탑도 가볍게 구경하고 갔다. 날이 더워서 루프탑을 이용하지 못했지만 문래동의 풍경과 하늘이 한눈에 보여서 역시나 좋았다. 오늘은 날이 더워 오후 늦게 잠깐 머물고 가지만 다음에 날이 선선해지면 문래동에 또 놀러 와야겠다.


내가 오늘 왜 기분 좋은지 알았다. 왜냐하면 오늘 하루는 다 좋은 선택의 연속이었기 때문이다. 마음을 2번이나 바뀌어 문래동에 왔고, 가려던 식당은 주문 마감 때문에 설렘이 넘치는 양식집으로 갔으며, 가려던 카페는 자리가 없어 내가 오늘 우연히 발견한 카페에 왔고, 커피와 디저트도 딱 기분 좋게 시킨 것도 좋은 선택이었다. 이런 날은 자주 있는 게 아니다. 그래서 나는 오늘 보내온 하루가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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