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심한 안구건조증이 남긴 것
내가 유학하면서 얻은 또 하나가 있는데, 바로 극심한 안구건조증이다. 요즘 안구건조증 없이 사는 현대인이 어디 있겠냐 마는, 나는 그 증상이 조금 많이 심했다. 2학년 1학기까지는 대개 아날로그 과제였음에도 컴퓨터를 보는 시간이 상당했다. 특히 한 학기 과제물을 정리해서 내야 하는 학기말에는 더더욱. 그때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안구 통증이 시작되었다. 조금 시큰거리는 정도가 아니라, 왼쪽눈을 칼로 베는 정도의 아픔이었다. 눈을 뜨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과제는 해야 했다. 다행히 오른쪽은 통증이 거의 없어 왼쪽 눈은 안대로 가리고 과제를 이어나갔다.
처음에는 인공눈물과 안약 좀 넣고 이렇게 보는 행위를 줄이면 나아질 줄 알았다. 그런데 나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며칠 지속되니 혹시 이러다 시력을 잃는 건가 덜컥 겁도 났다. 학교 보건실에서는 큰 문제는 없어 보이고 그저 건조하다고만 했다. 컴퓨터 화면 색과 밝기를 조정하고 약을 넣으라는 진부한 처방이 전부였다. 컴퓨터 화면을 누리끼리한 색으로 바꾸라니, 디자인과 학생한테는 불가능한 제안이었다.
그 해 여름방학, 한국에 입국해 큰 안과에서 검사를 받았다. 아직 젊은데 눈물 증발을 막는 막이 전부 손상됐고 눈을 제대로 깜빡이지 않아 사실상 눈이 공기에 계속 노출이 된다며 꽤 혼났다. 아팠던 건 눈에 상처가 있는데 너무 건조해서 그렇단다. 그래서 간단한 시술도 여러 차례 받았다. 그런다고 안구건조증이 완치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학년이 올라가면서 디지털 화면을 봐야 하는 시간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고, 통증은 불가피했다.
그러나 내가 더 괴롭고 두려웠던 것은 눈을 쓰지 못하는 그 상황이었다. 눈이 너무 아프면 과제가 아무리 많아도 쉴 수밖에 없었다. 눈을 뜨고 있을 수가 없었으니까. 그런데 보는 것을 그만두니 할 게 정말 없었다. 내 여가 활동인 웹툰, 드라마, 유튜브 시청, 독서, 십자수 모두 눈을 피로하게 하는 활동들이었다. 그래서 할 수 있는 것이 침대에 누워 안대로 눈을 가리고 음악을 듣는 것밖에 없었다. 나중에는 종종 소리책을 듣기도 했다.
이 경험은 나에게 눈이 있다는 것을 인지시켰다. 웃긴 말이지만, 태어나는 순간부터 당연했기에 잊고 살았던 것이다. 그리고 얼마나 인간이 시각에 의존하는 지도. 온 세상에 시각 자료밖에 없다. 실제로 색채공학 책에서는 다섯 가지 감각 중 시각이 대부분을 차지하며 뇌가 색을 인지하는 데에 정말 많은 에너지를 소비한다고 한다. 청각을 잃는 것보다 시각을 잃었을 때 불편함이 더 크지 않을까? 그런데 난 지금 눈이 아프고, 시각과는 떼어놓을 수 없는 분야인데. 어쩌지.
졸업 후 미국을 잠깐 여행하면서는 정말 행복했다. 원래 스마트폰을 많이 보지 않기에, 디지털 화면을 볼 일이 거의 없으니 눈이 아무렇지 않았다. 큰일 났다 생각했다. 안 그래도 전부 전산화 돼있어서 컴퓨터를 안 보는 직업이 없는데, 건축 설계와 디자인 분야는 더 하지 않은가. 그래서 글 쓰고 그림 그리는 요즘 아플 일이 별로 없어서 행복하다. (대신 안정적인 수입은 포기했지만...!) 편안히 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역시 사람은 있을 때는 그 고마움을 모르고 한 번 잃어야 그 소중함을 알게 되나 보다. 그래서 나에게 볼 수 있는 눈이 있다는 것은 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