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일

by 생각의정원


달력을 넘긴다. 12월. 벌써 일 년의 마지막 달이다. 나는 생각했다. 올해는 뭘 했나.


1월에는 다짐했다. 올해는 다를 거라고. 운동도 하고, 책도 읽고, 새로운 것도 배우고.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운동은 다섯 달 했고, 책은 열 한 권 읽었고, 새로운 건 배우지 못했다. 작심삼일도 아니고 작심이개월쯤 된 것 같다.


12월은 묘한 달이다. 끝이면서 시작이다. 정리하면서 준비한다. 아쉬워하면서 기대한다. 한 해를 돌아보라고 강요하는 달. 나는 돌아보기 싫다. 별로 한 게 없으니까.


회사에서는 연말정산 서류를 준비하라고 한다. 세금, 보험료, 의료비. 숫자로 환산된 일 년이다. 나는 올해 얼마를 벌었고, 얼마를 썼고, 얼마를 냈다. 인생이 엑셀 시트처럼 정리된다. 깔끔하지만 공허하다.


거리에는 크리스마스 장식이 걸린다. 11월 중순부터 걸리지만 12월 1일이 되어야 진짜처럼 느껴진다. 반짝이는 불빛들, 캐럴 음악, 산타클로스 인형. 사람들은 들뜬다. 나도 예전엔 들떴다. 언제부턴가 그냥 풍경이 되었다.


12월은 빠르다. 다른 달보다 유난히 빠른 것 같다. 1일이 지나면 바로 25일이고, 25일이 지나면 바로 31일이다. 중간이 없다. 마치 시간이 스킵 버튼을 누른 것처럼.


나는 생각했다. 왜 12월은 빠를까. 아마도 마감이 있어서일 것이다. 일 년이라는 마감. 사람들은 마감 앞에서 조급해진다. 올해 안에 뭐라도 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대부분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냥 조급해질 뿐이다.


와이프와 대화한다. "올해도 다 갔네." "그러게. 빨라." "내년엔 뭐 하고 싶어?" "글쎄... 당신은?" "나도 모르겠어." 우리는 계획 없는 사람들이다. 아니, 계획은 있는데 실행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차이가 있나.


아이를 보며 생각한다. 이 아이에게 올해는 어떤 의미일까. 내게 일 년은 빠르게 지나갔지만, 이 아이에게는 얼마나 긴 시간이었을까. 아이는 자랐다. 확실히 자랐다. 키도, 말도, 생각도. 어른에게는 정체된 시간이 아이에게는 성장의 시간이다.


12월 1일은 특별한 날이 아니다. 그냥 12월의 첫날일 뿐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의미를 부여한다. "벌써 12월이네", "올해도 얼마 안 남았네". 우리는 날짜에 의미를 부여하며 산다. 그래야 견딜 수 있으니까.


편의점에 들어간다. 크리스마스 케이크 예약 안내가 붙어 있다. 11월부터 있었지만 오늘 처음 보는 것 같다. 12월 1일이니까. 나는 예약하지 않는다. 크리스마스에 케이크를 먹어본 게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는다. 어른이 되면서 잃어버린 것들.


회사에서 송년회 날짜가 공지된다. 12월 24일. 나는 캘린더에 표시한다. 가기 싫다. 하지만 갈 것이다. 안 갈 수 없으니까. 송년회에서 팀장은 말할 것이다. "올해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내년에도 잘 부탁드립니다." 우리는 박수를 칠 것이다. 형식적으로.


누군가는 성공한 한 해였을 것이다. 승진했거나, 결혼했거나, 아이가 태어났거나. 누군가는 힘든 한 해였을 것이다. 실직했거나, 이별했거나, 아팠거나. 나는 그 중간이다. 크게 좋지도, 크게 나쁘지도 않은. 평범한 한 해.


그게 슬픈 건 아니다. 평범하다는 건 안전하다는 뜻이다. 큰 일 없이 지나갔다는 뜻이다. 감사해야 할 일이다. 하지만 왜 아쉬운 걸까. 뭔가 특별한 일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욕심.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


12월은 회고의 달이다. 지나간 시간을 돌아보라고 강요한다. 나는 돌아본다. 억지로. 1월, 2월, 3월... 12월. 각 달마다 뭘 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일하고, 집에 가고, 자고, 일어나고. 반복. 그게 내 일 년이었다.


하지만 디테일을 보면 다르다. 와이프와 함께 데이트 갔던 봄날. 아이와 놀이터에서 놀았던 여름 저녁. 가족과 함께 걸었던 가을밤. 작은 순간들이 모여서 일 년이 되었다. 특별하지 않지만 의미 있는 시간들.


나는 생각했다. 시간은 공평하다. 모두에게 12개월을 준다. 365일을 준다. 누구는 그 시간으로 대단한 것을 이루고, 누구는 그냥 흘려보낸다. 차이는 무엇일까. 의지? 운? 환경? 아마 다 섞여 있을 것이다.


12월 1일은 또 다른 기회다. 아직 한 달 남았다. 올해를 의미 있게 마무리할 수 있는 시간. 하지만 나는 안다.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을 거라는 걸. 그냥 하루하루 살아갈 거라는 걸. 그게 내 방식이라는 걸.


집으로 돌아간다. 와이프가 묻는다. "저녁 뭐 먹을까?" "아무거나." "김치찌개?" "좋아." 우리는 작은 것에 만족하는 사람들이다. 저녁 메뉴가 결정되면 하루가 계획된 것 같다. 소소한 행복.


저녁을 먹으며 생각한다. 12월이 지나면 1월이 온다. 또 다시 새해다짐을 할 것이다. 올해야말로 다를 거라고. 하지만 아마 비슷할 것이다. 작년처럼, 올해처럼. 인생은 반복이다.


그래도 괜찮다. 반복 속에서 조금씩 변한다. 작년의 나와 올해의 나는 다르다. 눈에 띄게 다르지는 않지만 분명 다르다. 조금 더 나이 들었고, 조금 더 지혜로워졌고, 조금 더 무뎌졌다. 그게 성장이다.


12월 1일. 벌써 일 년의 마지막 달. 이 말을 매년 한다. 내년에도 할 것이다. 내후년에도. 평생. 그렇게 12월은 돌아온다. 매년. 끝이면서 시작인 달.


나는 달력을 다시 본다. 12월 1일부터 31일까지. 30일이 아니라 31일이다. 하루를 더 번 셈이다. 감사해야 한다. 하루라도 더 살 수 있다는 것에. 하루라도 더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할 수 있다는 것에.


창밖을 본다. 거리의 불빛이 반짝인다. 12월의 불빛은 다르다. 더 따뜻해 보인다. 착각이겠지만 그렇게 믿기로 한다. 12월은 그런 달이다. 착각과 위로로 버티는 달.


올해도 얼마 남지 않았다. 마무리를 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마무리가 뭔지 모르겠다. 그냥 잘 살면 되는 거 아닐까. 하루하루. 특별하지 않아도. 평범해도. 그렇게 12월을 보내면 되는 거 아닐까.


나는 생각했다. 12월 1일은 특별한 날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가 특별하게 만들 수 있다. 의미를 부여하면 의미가 생긴다. 그게 인간이 시간을 사는 방식이다.


오늘도 하루가 지나간다. 12월의 첫날. 마지막 달의 첫날. 특별하지 않은 특별한 날. 그렇게 우리는 살아간다. 날짜를 넘기며.


작가의 이전글다이어트 평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