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 수 있는 용기

by 생각의정원

어느 오후, 나는 작은 재즈바에 앉아 있었다. 피아노가 흘러나오고 있었고, 바텐더는 능숙한 손놀림으로 위스키 잔을 닦고 있었다. 그때 옆자리에 앉은 중년 남자가 조용히 울고 있었다. 소리 없이, 마치 오래전부터 연습해온 것처럼 익숙한 방식으로.


나는 그의 눈물을 보면서 생각했다. 우리는 언제부터 울음을 참는 것을 용기라고 배웠을까.


어렸을 때 우리는 울음이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슬프면 울었고, 아프면 울었고, 때로는 너무 기쁘거나 아름다워서도 울었다. 그것은 호흡만큼이나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세상은 우리에게 말했다. "이제 그만 울어야 해." "강한 사람은 울지 않아." "눈물은 약한 사람의 것이야."


그렇게 우리는 눈물을 삼키는 법을 배웠다. 목구멍 깊숙한 곳에 슬픔을 가두어두고, 눈 뒤편에 아픔을 숨기고, 가슴 한구석에 외로움을 접어두는 법을. 마치 오래된 편지를 서랍 깊숙이 넣어두듯이.


하지만 삼킨 눈물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 안 어딘가에 고여서, 작은 호수가 되고, 때로는 바다가 된다. 우리는 그 위를 걸어 다니며 살아간다. 조심스럽게, 얼음이 깨질까 봐 두려워하면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읽다 보면 종종 이런 문장을 만난다.

"눈물이란 것은 참 이상한 거야. 나오고 싶을 때 나오는 게 아니라, 나와야 할 때 나오는 거니까."


나는 이 말이 정확하다고 생각한다. 눈물은 우리의 의지와는 별개로 작동하는 어떤 정직한 시스템 같은 것이다. 마치 비가 내려야 할 때 내리는 것처럼, 눈물도 흘러야 할 때 흐른다. 그것을 막는 것은 우산으로 태풍을 막으려는 것만큼이나 무모한 일이다.


울음을 참는 것이 강함이라면, 우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그것이 더 큰 용기라고 생각한다. 세상이 강요하는 강함의 가면을 벗어던지고,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는 용기.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때로는 무너져도 괜찮다고 스스로에게 말할 수 있는 용기.


그 재즈바의 남자는 한참을 울고 나서 조용히 잔을 비웠다. 바텐더는 아무 말 없이 새 냅킨을 건넸고, 남자는 고맙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빌 에반스의 피아노는 여전히 흐르고 있었다.


나는 생각했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가 만들어야 할 세상인지도 모른다. 누군가 울어도 괜찮은 곳. 눈물을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되는 곳. 슬픔이 약함의 증거가 아니라 인간다움의 표현이 되는 곳.


울 수 있다는 것은 아직 우리 안에 무언가가 살아있다는 증거다. 차갑게 굳어버리지 않았다는, 무감각해지지 않았다는, 여전히 무언가를 느낄 수 있다는 증거. 그것은 패배가 아니라 생존의 증명이다.


때로 나는 도시의 밤거리를 걸으며 생각한다. 이 수많은 불빛 뒤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홀로 울고 있을까. 욕실에서, 차 안에서, 어두운 방 한구석에서. 세상에 들키지 않으려 조심하며.


하지만 우리는 알아야 한다. 울음이 우리를 약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오히려 울지 못하는 것, 눈물마저 얼어붙어버린 것이 진짜 위험이라는 것을.


울 수 있는 용기. 그것은 자신에게 정직할 수 있는 용기이고, 자신의 고통을 인정할 수 있는 용기이고, 무엇보다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용기다. 왜냐하면 우는 것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기 때문이다. 정화의 시작, 치유의 시작, 새로운 출발의 시작.


그날 밤 나는 집으로 돌아와 오래된 비닐 레코드를 틀었다. 쳇 베이커의 트럼펫이 조용히 흘러나왔다. 나는 창밖을 보며 생각했다.


언젠가 우리 모두가 자유롭게 울 수 있는 날이 올까. 눈물이 더 이상 숨겨야 할 것이 아니라, 나눌 수 있는 것이 되는 날이.


그날까지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버틸 것이다. 때로는 울면서, 때로는 웃으면서.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하다.


완벽하지 않아도, 강하지 않아도, 우리는 충분하다.


울 수 있다는 것, 그것은 여전히 인간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보다 더 큰 용기가 또 어디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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