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신발에 대하여

by 생각의정원

아이의 신발을 사러 유아용품점에 갔다. 아이가 좋아하는 그 한 켤레를 하루 종일 신고 다녀서 밑창이 다 닳아버린 것이다. 진열창에는 손바닥만 한 크기의 신발들이 가지런히 늘어서 있었는데, 그것들은 마치 각자의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그 앞에서 한참을 멈춰 서 있었다.


작은 발을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한 신발. 그것은 단순한 물건이 아니라 하나의 약속 같은 것이었다. 이 세상의 거칠은 바닥으로부터 연약한 것들을 지키겠다는, 조용하지만 확고한 다짐 말이다.


문득 내가 처음 혼자 신발끈을 매던 순간이 떠올랐다. 여섯 살 무렵이었나. 어머니가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끈을 X자로 교차시키는 방법을 가르쳐주셨다. "이렇게 해서, 이렇게 돌리고, 그다음에..." 하지만 나는 계속 실패했다. 끈은 엉키고, 매듭은 헐거워졌다. 어머니는 참을성 있게 같은 동작을 반복해 보이셨다.


그때는 몰랐다. 신발끈을 매는다는 것이 단순한 기능적 행위가 아니라는 것을. 그것은 스스로 걸어갈 준비를 하는 의식이었다. 누군가의 손을 빌리지 않고도 자신의 발걸음을 챙길 수 있다는 것, 그 작은 독립의 첫 단계였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는 평생에 걸쳐 자신에게 맞는 신발을 찾아다니는 것 같다. 학창시절에는 모두가 똑같은 운동화를 신어야 했고, 직장에 다니기 시작하면서는 발이 답답해도 운동화, 구두를 신어야 했다. 때로는 남들 눈에 보기 좋은 신발을 신느라 발가락이 구겨지는 것쯤은 참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기 신발은 다르다. 거기에는 타협이 없다. 오직 그 작은 발이 편안할 것만을 고려해서 만들어진다. 부드러운 소재, 발가락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넉넉한 공간, 발목을 안정적으로 잡아주는 높이. 아직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아이를 대신해서, 어른들이 최선을 다해 상상하고 배려한 결과물이다.

나는 때때로 그런 배려를 받던 시절이 그립다. 누군가가 내 발의 상태를 살펴보고, 내가 편안히 걸을 수 있을지를 먼저 걱정해주던 시간들. 물론 지금도 그런 사람들이 있다. 다만 예전처럼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뿐이다.


재즈를 들으며 커피를 마시던 어느 일요일 오후, 라디오에서는 빌 에반스의 피아노가 흘러나왔다. 조용하고 섬세한 터치의 연주였는데, 그 음표 하나하나가 마치 아이의 발걸음처럼 조심스럽고 정확했다. 너무 빠르지도, 너무 세지도 않게. 바닥의 상태를 확인하며 한 걸음씩 내딛는 그런 신중함이 있었다.


아기들은 처음 걸음마를 배울 때 수없이 넘어진다. 하지만 그들은 넘어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아니, 두려워할 줄 모른다고 하는 편이 맞겠다. 다시 일어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여긴다. 우리 어른들이 망설이고 주저하는 동안, 아이들은 이미 다음 걸음을 준비하고 있다.


그 작은 신발들을 보고 있으니, 문득 궁금해졌다. 내가 지금 신고 있는 이 신발은 과연 나에게 맞는 신발일까. 발가락이 편안한가, 발목이 안정적인가, 걸을 때마다 바닥의 충격이 제대로 흡수되고 있는가. 아니면 그저 익숙해져서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때로는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아기 신발을 처음 신던 그 순간으로 돌아가서, 이번에는 조금 더 신중하게, 조금 더 정직하게 내 걸음을 선택해보고 싶다. 남들 시선이 아니라 내 발의 감각을 믿으며.


유아용품점을 지날 때면 나는 이제 그 작은 신발들을 다시 한 번 보게 된다. 그 신발들이 언젠가 어떤 아이의 발에 맞춰져서, 처음 몇 걸음을 함께 걸어갈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아마도 그 아이도 자라서 언젠가는 자신만의 신발을 스스로 고르게 될 테고, 그때쯤이면 이 작은 신발의 존재는 까맣게 잊혀져 있을 것이다.


결국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은 맞는 신발이 아니라, 자신의 걸음걸이를 존중해주는 신발인지도 모르겠다. 빠르지 않아도, 완벽하지 않아도, 그저 진실하게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을 묵묵히 함께해주는 그런 신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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