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이라는 공간

by 생각의정원

토요일 오후였다. 할 일이 없었다. 아니, 할 일은 있었지만 하고 싶지 않았다. 빨래, 청소, 밀린 드라마. 모두 집에서 하는 일들이었다. 집에 있고 싶지 않았다.


도서관에 갔다.


구립 도서관이었다. 집에서 걸어서 십오 분. 크지 않은 건물. 3층짜리. 1층은 어린이 열람실, 2층은 일반 열람실, 3층은 서고.


자동문을 밀고 들어갔다. 조용했다. 당연했다. 도서관은 원래 조용한 곳이었다.


신발 소리가 났다. 복도를 걷는 소리. 나만 들리는 소리 같았다. 2층으로 올라갔다. 계단을 천천히 밟았다.


일반 열람실이었다. 넓었다. 긴 테이블들이 줄지어 있었고,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학생들, 어른들, 노인들. 각자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공부하거나, 책을 읽거나, 노트북을 두드리거나.


빈자리를 찾았다. 창가 쪽. 햇살이 들어오는 자리. 가방을 내려놓았다. 의자를 당겨 앉았다.


아무것도 꺼내지 않았다. 그냥 앉아 있었다.


이상했다. 카페에 앉아 있으면 뭔가 주문해야 할 것 같았다.

공원 벤치에 앉아 있으면 이상해 보일 것 같았다. 하지만 도서관에서는 그냥 앉아 있어도 괜찮았다.


아무도 나를 신경 쓰지 않았다. 모두 자기 일에 집중했다.


책, 노트북, 교재. 각자의 세계.


천장을 봤다. 형광등이 있었다. 밝지만 부드러운 빛. 에어컨 소리가 들렸다. 낮게, 일정하게.


누군가 책장을 넘겼다. 바스락. 다른 누군가가 기침을 했다. 작게. 멀리서 의자가 끌리는 소리. 삐익.


소음이었지만 시끄럽지 않았다.

오히려 편안했다.

살아있는 소리들.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증거.


대학생 때 도서관을 자주 갔었다.

시험 기간이면 하루 종일 있었다.

아침 아홉시에 들어가서 저녁 아홉시에 나왔다.

점심은 학생 식당에서, 저녁은 편의점에서.


그때는 공부하러 갔었다.

목적이 있었다.

시험, 과제, 발표. 해야 할 것들.

하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냥 있었다.


옆 자리에 여자가 앉았다. 이십대 초반으로 보였다. 대학생 같았다.

책을 펼쳤다. 두꺼운 전공책. 형광펜으로 줄을 그었다.

노트에 뭔가 적었다.

집중하고 있었다.

세상에 자기밖에 없는 것처럼.


부러웠다. 저렇게 집중할 수 있다는 게.

목표가 있다는 게. 해야 할 것이 명확하다는 게.


나에게는 그런 게 없었다. 회사 일은 있었지만, 그건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의 일이었다. 지금은 토요일 오후였다.


가방에서 책을 꺼냈다. 일주일 전에 산 책. 반쯤 읽었던 책. 펼쳤다. 어디까지 읽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아무 페이지나 펼쳤다.


읽기 시작했다.

천천히. 한 문장, 두 문장. 이해가 됐다. 안 됐다. 상관없었다. 그냥 읽었다.


시간이 지났다. 얼

마나 지났는지 몰랐다. 한 시간쯤? 두 시간쯤? 시계를 보지 않았다.


책을 덮었다.

몇 페이지를 읽었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괜찮았다.


일어났다. 서고로 올라갔다. 3층. 더 조용했다. 사람이 별로 없었다.


책장 사이를 걸었다. 문학, 역사, 철학, 과학. 분야별로 정리돼 있었다.

깔끔했다. 질서가 있었다.

한 권을 꺼냈다. 아무거나. 표지를 봤다. 제목을 읽었다. 뒤표지를 뒤집었다. 다시 꽂았다.


계속 걸었다. 멈췄다. 또 한 권을 꺼냈다. 펼쳤다. 읽었다. 다시 꽂았다.


목적이 없었다. 찾는 책이 없었다. 그냥 걸었다.


도서관은 이상한 공간이었다.


집도 아니고, 회사도 아니고, 카페도 아니었다.

내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낯설지 않았다.


아무것도 사지 않아도 됐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됐다. 그냥 있어도 됐다.


혼자였지만 혼자가 아니었다.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서로 간섭하지 않았다. 각자의 시간을 살았다.


조용했지만 무섭지 않았다. 고요했지만 외롭지 않았다.


시간이 느렸다. 밖에서는 하루가 빨리 지나갔다.

출근하고, 일하고, 퇴근하고, 자고, 또 출근하고. 계속 쫓기는 것 같았다.


하지만 도서관에서는 시간이 달랐다. 천천히 갔다. 아니, 멈춰 있는 것 같았다. 아름답게.


창밖을 봤다. 해가 기울고 있었다. 석양이었다. 주황빛이 열람실을 채웠다.


사람들이 하나둘 일어나기 시작했다. 책을 정리했다. 가방을 챙겼다. 조용히 나갔다.


나도 일어났다. 책을 가방에 넣었다. 의자를 밀어 넣었다.


1층으로 내려갔다. 밖으로 나왔다. 도서관 문을 나서는 순간, 소음이 들렸다.

차 소리, 사람들 대화 소리, 바람 소리.

현실이었다.


하지만 괜찮았다. 도서관은 여전히 거기 있었다. 내일도, 모레도, 다음 주 토요일에도.


필요할 때 갈 수 있었다. 피곤할 때, 혼자 있고 싶을 때, 그냥 앉아 있고 싶을 때.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곳. 아무도 나를 묻지 않는 곳. 시간이 천천히 가는 곳.


도서관이라는 공간.


집으로 걸어가며 생각했다. 다음 주에도 올까.

아마도. 같은 자리에 앉을 것이다.

같은 책을 펼칠 것이다. 아니면 다른 책을.


상관없었다. 중요한 건 그곳에 있다는 것. 조용히. 천천히.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저녁이 됐다. 집에 도착했다. 불을 켰다. 가방을 내려놓았다.


밀린 빨래를 봤다. 내일 해도 될 것 같았다.


소파에 앉았다. 책을 펼쳤다. 도서관에서 읽던 그 책. 계속 읽었다.


집도 조금은 조용했다. 도서관처럼은 아니었지만.


괜찮았다.


오늘 도서관에 다녀왔으니까.

그렇게 우리는 쉰다.


조용한 곳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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