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오후의 냄새

by 생각의정원

향수는 언제나 뒤에서 온다.


앞에서 오는 법이 없다. 예고도 없고 준비할 틈도 주지 않는다. 어느 오후, 지하철 환승 통로를 걷다가 문득 어떤 냄새를 맡는다. 젖은 시멘트와 오래된 형광등 불빛이 섞인 냄새. 그 순간 나는 이미 지금 이곳에 없다. 십오 년 전 어딘가의 복도 끝에 서 있다. 운동화 끝이 약간 닳아 있고, 배낭 지퍼가 반쯤 열려 있고, 나는 아직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게 향수다.


나는 향수를 과거에 대한 그리움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적어도 그것만은 아니다. 향수는 오히려 지금의 나를 낯설게 만드는 힘에 가깝다. 그 냄새를 맡은 순간, 지금 내가 입고 있는 코트도, 손에 든 커피도, 쌓아온 시간들도 전부 잠시 정지한다. 그리고 나는 생각한다.


아, 나는 그 이후로도 계속 살아왔구나.

그게 신기하기도 하고, 조금 쓸쓸하기도 하다.


상하이에 살 때 일이다. 푸동 공항 근처 작은 카페에서 아메리카노를 마시던 오후가 있었다. 그날 따라 커피 향이 이상하게 진했는데, 그 냄새가 갑자기 서울의 어떤 골목을 불러왔다. 이십대 초반, 아직 아무 계획도 없던 때. 왜 하필 그 골목이었는지는 모른다. 향수는 설명을 거부한다. 그냥 온다. 아무 경위도 없이.


그래서 향수는 사진과 다르다. 사진은 기억을 고정시키지만 향수는 기억을 흔든다. 사진 속의 나는 웃고 있고, 그날 날씨는 맑았고, 우리는 어느 식당 앞에 서 있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의 기록이지 감각의 기록이 아니다. 향수는 그 식당에서 맡았던 된장찌개 냄새와 창문 너머로 들리던 빗소리와, 그날 내가 마음속으로 무엇을 걱정하고 있었는지를 통째로 데려온다.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느끼게 한다.


가끔 생각한다. 지금 이 순간도 언젠가는 향수가 될 것이라고.

지금 마시는 이 커피의 온도, 창밖으로 보이는 저 가로수의 각도,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의 숨소리. 이것들이 십 년 후 어느 낯선 오후에 나를 찾아올 것이다. 그때의 나는 아마 지금의 이 순간을 그리워할 것이다.

지금 내가 그리워하는 줄도 모르고 살고 있는 것처럼.


그러니까 향수란 결국, 현재를 살고 있다는 증거다.


충분히 살았기 때문에 그리워할 무언가가 생기는 것이다.

냄새 하나에 멈춰 설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깊이 살았다는 뜻이다. 나는 그것이 슬프지 않다. 아주 약간 쓸쓸하긴 하지만, 그 쓸쓸함은 나쁘지 않은 종류의 것이다.


환승 통로를 빠져나오면서 나는 다시 지금으로 돌아온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신다.

지하철 플랫폼에 바람이 분다.

나는 코트 깃을 세우고 걸음을 옮긴다.


향수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냥 다시 뒤쪽으로 물러났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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