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 없이 떠난 여행만이 줄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어느 금요일 오후였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그냥 문득, 지금 여기가 아닌 다른 어딘가에 있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창밖에 비가 내리고 있었고, 모니터 화면은 여전히 처리하지 못한 일들로 가득했고, 나는 그 앞에 앉아서 전혀 다른 것을 검색하고 있었다. 기차 시간표.
가장 빠른 기차가 두 시간 뒤에 있었다.
나는 별로 고민하지 않았다. 고민을 오래 하면 결국 안 가게 된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이성이 개입하기 전에 몸이 먼저 움직여야 한다. 나는 가방에 옷 두어 벌을 밀어 넣고, 세면도구를 챙기고, 충전기를 꽂다가 뽑고, 결국 그냥 절반만 찬 배터리로 나왔다.
현관문을 닫는 순간, 무언가 가벼워졌다.
갑작스런 여행의 첫 번째 감각은 언제나 그 가벼움이다. 해야 할 일들이 현관 안쪽에 남겨진 느낌. 물론 그것들은 사라지지 않는다. 돌아오면 여전히 거기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 이 순간, 그것들은 나와 다른 공간에 있다. 그것만으로도 숨이 조금 트인다.
기차역은 늘 좋다.
어디론가 가는 사람들과 어디선가 돌아온 사람들이 뒤섞여 있는 곳. 각자의 이유로 각자의 방향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사람들. 나는 그 흐름 속에 섞여 플랫폼으로 내려간다. 기차가 들어올 때의 바람이 좋다. 머리카락이 흩어지고, 코트 자락이 흔들리고, 잠깐 눈을 감는다. 그 몇 초가 이상하게 자유롭다.
목적지를 딱히 정하지 않았다. 그냥 한 시간 반쯤 가는 곳이면 됐다. 너무 가까우면 여행 같지 않고, 너무 멀면 계획이 필요해진다. 갑작스런 여행은 계획과 맞지 않는다. 계획이 생기는 순간 그것은 이미 다른 무언가가 된다.
창밖으로 도시가 멀어진다.
건물들이 낮아지고, 논이 나타나고, 하늘이 넓어진다. 나는 그 변화를 멍하니 바라본다. 이어폰을 꽂을까 하다가 그냥 두었다. 기차 소리만으로도 충분했다. 규칙적인 진동과 소음이 오히려 머릿속을 비워주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 했고, 실제로 한동안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런 시간은 일상에서는 거의 불가능하다.
낯선 역에 내리면 일단 걷는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기 때문에, 그냥 사람들이 나가는 방향으로 따라간다. 역 앞 광장에 서서 잠깐 두리번거린다. 아무도 나를 모른다. 나도 아무것도 모른다. 이 도시의 골목이 어디로 이어지는지, 어느 식당이 맛있는지, 저 건물 안에 무엇이 있는지. 그 모름이 불편하지 않다. 오히려 그 모름이 여행의 핵심이다.
일상에서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다.
어느 마트가 싸고, 어느 시간대에 길이 막히고, 저 사람이 오늘 기분이 좋은지 나쁜지. 익숙함이란 편안함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감각이 무뎌지는 일이기도 하다. 갑작스런 여행은 그 무뎌진 감각을 다시 깨운다. 낯선 골목에서는 간판 하나도 눈에 들어오고, 처음 맡는 냄새가 기억에 새겨지고, 모르는 사람들의 대화 소리가 이상하게 선명하게 들린다.
저녁은 아무 데나 들어갔다.
메뉴를 보고 잘 모르는 것을 시켰다. 혼자 앉아 천천히 먹었다. 맛있었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오늘 내가 여기 있다는 사실 자체가 어딘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몇 시간 전만 해도 나는 모니터 앞에 앉아 기차 시간표를 검색하고 있었는데, 지금 나는 이름도 몰랐던 도시의 작은 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다. 인생은 생각보다 쉽게 바뀐다. 그냥 일어나서 나가기만 하면 된다.
숙소는 작고 낡은 곳이었다.
이불 냄새가 조금 났고, 창문으로 바깥 소리가 들렸다. 나는 누워서 천장을 봤다. 낯선 천장이었다. 우리 집 천장과 다른 모양, 다른 얼룩, 다른 조명의 각도. 그 낯섦이 좋았다. 나는 한동안 그 천장을 바라보다가 자연스럽게 잠이 들었다. 집에서보다 훨씬 빨리.
갑작스런 여행이 주는 것은 새로운 풍경이 아니다.
잠깐 다른 사람이 되는 느낌이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서, 아무것도 기대되지 않는 곳에서, 나는 그냥 지금 여기 있는 사람이 된다. 역할도 없고, 의무도 없고, 어떤 사람이어야 한다는 압박도 없다. 그 가벼움이 하루쯤 지속되고 나면,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이 조금 덜 무겁게 느껴진다.
다음 날 오전, 나는 다시 기차를 탔다.
창밖으로 왔던 길이 반대 방향으로 펼쳐졌다. 논이 나타나고, 건물이 높아지고, 하늘이 다시 좁아졌다. 집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해야 할 일들이 다시 현관 안쪽에서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제의 낯선 천장이 아직 눈 안에 남아 있었다.
그것으로 충분히 멀리 다녀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