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졸업, 큰 침묵

by 생각의정원

아이가 수료증을 받아 드는 사진을 보는 순간, 나는 스마트폰 화면을 들여다보면서 동시에 어딘가 이상한 감각을 느꼈다. 기쁜 것은 분명했다. 그런데 그 기쁨의 아래에 무언가 다른 것이 섞여 있었다. 정확히 뭐라고 이름 붙이기 어려운, 약간 쓴맛이 나는 감정.


마치 좋아하는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는 순간과 비슷했다.


아이는 아직 수료식이 뭔지 모른다. 자기가 왜 이 작은 종이를 들고 사진을 찍는지도 모른다. 그냥 주변 어른들이 웃고 있으니까 같이 웃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그 무심함이 오히려 나를 더 흔들었다.


나는 그 자리에 없었다. 어른들의 세계는 항상 그런 식으로 아이의 시간과 어긋난다. 선생님이 보내준 사진 속 아이는 꽃받침 모양의 작은 모자를 쓰고, 수료증을 양손으로 받아 들고 있었다. 나는 그 사진을 회의실 복도에서 혼자 들여다보았다. 오래.


중요한 순간은 항상 그것을 중요하다고 느끼는 사람과 아직 그것을 모르는 사람 사이의 온도 차이로 이루어져 있다. 나는 그 온도 차이의 뜨거운 쪽에 서 있었고, 아이는 시원한 쪽에서 모자를 잡아당기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어느 쪽에도 없었다.


나는 10년 넘게 기획 일을 해왔다. 프로젝트의 시작과 끝을 수없이 경험했다. 론칭의 흥분, 마감의 안도, 그리고 프로젝트가 끝났을 때 찾아오는 묘한 공허감. 그 공허감은 실패해서 오는 게 아니다. 오히려 잘 끝냈을 때 더 깊게 찾아온다. 무언가가 완성되었다는 것은, 동시에 그것이 더 이상 진행 중이 아니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아이의 수료식도 그런 느낌이었다. 이 아이가 태어나서 처음 맞이하는 ‘끝’이자 ‘시작’. 나는 사진 속 그 경계선 바깥에서, 지나간 스물세 달을 조용히 되감았다.


처음으로 눈을 맞췄던 새벽. 뒤집기에 성공하고 혼자 어리둥절해하던 표정. 첫걸음을 내딛다가 엉덩방아를 찧고도 울지 않았던 날. 그 장면들이 슬라이드처럼 지나갔다. 필름 카메라로 찍은 사진처럼, 조금 흐릿하고, 조금 따뜻하게. 그리고 오늘 이 사진 한 장이, 그 마지막 슬라이드로 조용히 끼어들었다.


부모가 된다는 것은, 끊임없이 작별을 연습하는 일이라는 걸 나는 이제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했다.


신생아였던 아이는 이미 없다. 그 작고 붉은 얼굴의 아이는 어딘가로 가버렸고, 지금 이 자리에는 제 발로 뛰어다니고 ‘아빠’라는 단어를 발음하는 다른 아이가 사진 속에 서 있다. 그리고 이 아이도 언젠가는 어딘가로 가버릴 것이다. 더 큰 아이가 되어, 더 넓은 세계로. 나는 그때도 이렇게, 화면으로 그 순간을 보게 될까.


나는 그것을 기뻐해야 한다는 걸 안다. 그리고 실제로 기쁘다. 다만, 기쁨이 언제나 단색이 아니라는 것도 안다. 기쁨 안에는 아쉬움이 섞여 있고, 자랑스러움 안에는 후회가 숨어 있다.

그 복잡한 혼합물을 사람들은 간단하게 ‘감동’이라는 말로 처리해버리지만, 나는 그 안의 각각의 감정들을 조금 더 오래 들여다보고 싶었다.


특히 오늘은.


저녁에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아이는 현관에서 나를 보더니 달려왔다. ‘아빠!’ 하고. 수료식이 뭔지도, 오늘 자기가 무언가를 받았다는 것도, 아마 이미 잊어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는 웃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아내가 조용히 말했다. “사진 봤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말이 필요 없었다. 같은 것을 느끼고 있다는 걸, 서로 알고 있었다.


2월인 지금, 창밖은 어둑해지고 있었다.

아직 차갑지만 어딘가 봄의 냄새가 섞인 공기. 나는 아이를 안아 들었다. 조금 더 세게. 수료증은 어린이집 가방 안 어딘가에 구겨져 있을 테지만, 그것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중요한 것은 종이가 아니라, 그 종이를 받던 순간의 표정이었으니까. 내가 없었어도, 아이는 웃고 있었으니까.


나는 아마 앞으로도 이런 순간들을 수없이 겪을 것이다. 입학식, 첫 친구, 첫 실패, 첫 이별. 그 모든 ‘처음’들 앞에서, 나는 매번 이 묘한 감정을 다시 배워야 할 것이다. 기쁘면서 아린, 자랑스러우면서 두려운, 앞으로 나아가면서도 뒤를 돌아보는.


그리고 가능하면, 그 자리에 있어야겠다고 오늘 다짐했다. 화면이 아니라, 그 공기 속에.


그게 아빠라는 역할의 감정적 질감인 것 같다. 항상 두 가지 방향을 동시에 바라보는 사람. 아이가 향하는 앞과, 아이가 지나온 뒤를.


그리고 나는 오늘도 그 사이에 서서, 식어가는 커피를 홀짝이며 생각한다.


이 아이가 언젠가 자신의 아이를 키우게 될 때, 오늘 내가 느낀 이 감정을 이해하게 될까.

그때서야 비로소 전화를 걸어올까?


받을게, 아들아. 언제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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