삿포로에서 길을 잃다

by 생각의정원

스물 한 살 겨울, 나는 혼자 비행기를 탔다. 목적지는 삿포로였다.

친구들은 왜 하필 겨울에 홋카이도냐고 물었지만, 나는 그냥 눈이 보고 싶었다.

서울의 눈이 아닌, 진짜 눈 말이다.


신치토세 공항에서 JR을 타고 삿포로역에 도착했을 때는 오후 세 시였다. 이미 해가 기울고 있었다. 나는 호텔 주소를 적은 메모를 꺼내 들었다. 스스키노 어딘가에 있는 작은 비즈니스 호텔이었다. 구글맵을 켜고, 배낭을 메고, 걷기 시작했다. 설마 잃어버리겠어, 라고 생각했다. 스마트폰이 있는데.


그런데 삿포로의 겨울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어두웠다. 오후 네 시만 되어도 거리에 가로등이 켜졌다. 눈은 계속 내렸고, 내 핸드폰 화면 위로도 하얀 눈송이가 쌓였다. 화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장갑을 벗고 닦으려다 손가락이 시려서 다시 꼈다. 그러는 사이 지도에서 내 위치를 나타내는 파란 점이 이상한 곳으로 튀었다.


나는 멈춰 섰다. 주변을 둘러봤다. 간판들이 죄다 일본어였다. 당연하지, 여긴 일본이니까. 하지만 그 당연한 사실이 갑자기 낯설게 느껴졌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 걸까.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물어볼까 생각했지만, 내 일본어 실력은 "스미마셍"과 "아리가또"가 전부였다.


다시 걷기 시작했다. 이번엔 구글맵을 끄고 그냥 직감으로 걸었다. 스스키노 쪽이 번화가라고 들었으니까, 불빛이 많은 쪽으로 가면 되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골목을 돌았다. 그리고 또 돌았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나는 같은 골목을 세 번째 지나고 있었다. 모퉁이에 있는 작은 라멘집의 빨간 등이 너무 익숙했다.


배가 고팠다. 아침부터 제대로 먹은 게 없었다. 비행기에서 준 샌드위치가 전부였다. 나는 그 라멘집 앞에 섰다. 유리창 너머로 김이 모락모락 나는 라멘 그릇들이 보였다. 안에는 손님이 다섯 명쯤 있었다. 모두 혼자였다. 카운터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면을 후루룩 먹고 있었다.


들어갈까, 말까. 한참을 망설이다가 문을 밀었다. 따뜻한 공기와 국물 끓는 냄새가 확 밀려왔다. "이랏샤이마세!" 주방 안쪽에서 요리사가 외쳤다. 나는 어색하게 고개를 숙이고 빈 자리에 앉았다. 메뉴판을 봤지만 한자투성이였다. 그래서 그냥 옆 사람이 먹는 걸 가리켰다. 미소라멘이었던 것 같다.


라멘이 나왔다. 하얀 국물에 노란 옥수수, 두툼한 차슈, 파. 젓가락을 들고 면을 집어 입에 넣었다. 뜨거웠다. 혀가 델 것 같았다. 하지만 맛있었다. 정말로 맛있었다. 서울에서 먹었던 어떤 라멘보다 맛있었다. 아니, 어쩌면 내가 길을 잃었기 때문에 더 맛있었는지도 모른다.


국물을 한 입 떠먹으면서 나는 생각했다. 지금 호텔에 가지 못해도 괜찮을 것 같다고. 최악의 경우 이 근처 다른 숙소를 찾으면 되니까. 아니면 맥도날드에서 밤을 새워도 되고. 어차피 혼자 여행이잖아. 계획대로 안 되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


라멘을 다 먹고 나왔을 때, 눈은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조금 전보다는 덜 추운 것 같았다. 배가 부르니까. 나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이번엔 조금 다른 방향으로. 그리고 골목을 하나 돌았을 때, 갑자기 눈앞이 환해졌다. 네온사인들, 간판들, 사람들. 스스키노였다.


웃음이 났다. 나는 라멘집에서 불과 두 블록 떨어진 곳에 있었던 것이다. 호텔은 거기서 다시 세 블록. 핸드폰을 다시 켰다. 이번엔 파란 점이 정확한 곳을 가리키고 있었다. 십 분 후, 나는 호텔 로비에 서 있었다.


체크인을 하고 방에 들어가 배낭을 내려놓았다. 창문 밖으로 삿포로의 야경이 보였다. 눈은 계속 내렸다. 나는 침대에 앉아 핸드폰을 꺼내 오늘 찍은 사진들을 봤다. 공항, 기차, 눈길. 그리고 그 라멘집 앞에서 찍은 사진 한 장. 빨간 등과 흐릿한 유리창.


삿포로에서의 첫날은 그렇게 지나갔다. 길을 잃고, 배고프고, 추웠던 날.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날이 여행 중 가장 기억에 남는다. 계획대로 호텔을 찾았다면, 그 라멘집을 발견하지 못했을 테니까. 그 뜨거운 국물의 맛도, 혼자 앉아 면을 먹으며 느꼈던 묘한 안도감도 몰랐을 것이다.


여행이란 게 그런 것 같다. 길을 잃는다는 건 무서운 일이지만, 동시에 예상치 못한 것을 발견하는 일이기도 하다. 지도가 가리키는 대로만 가면 안전하지만, 그럼 지도에 없는 것들은 영영 모르고 지나친다.


다음 날 아침, 나는 다시 그 라멘집을 찾아갔다. 이번엔 길을 잃지 않았다. 하지만 어제만큼 맛있지는 않았다. 여전히 맛있었지만, 뭔가 다른 맛이었다. 어쩌면 라멘의 맛이 달라진 게 아니라 내가 달라진 걸지도 모른다. 어제의 나는 길을 잃은 사람이었고, 오늘의 나는 길을 아는 사람이니까.


삿포로에서 보낸 일주일 동안, 나는 더 이상 길을 잃지 않았다. 시계탑도 갔고, 오도리 공원도 갔고, 삿포로 맥주 박물관도 갔다. 다 좋았다. 하지만 가장 좋았던 순간을 꼽으라면, 그 겨울밤 골목에서 라멘집 빨간 등을 발견했을 때라고 말할 것 같다.


지금도 가끔 삿포로 생각이 난다. 특히 눈 오는 날에.

그럴 때면 나는 생각한다.

길을 잃는다는 건 나쁜 일이 아니라고.

때로는 길을 잃어야만 찾을 수 있는 것들이 있다고.

뜨거운 라멘처럼, 작은 용기처럼, 혼자서도 괜찮다는 깨달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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