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아내와 함께 미술관에 갔다.
17개월 된 아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천천히 걸으며 그림들을 보았다. 아이는 화려한 색깔의 작품 앞에서 손을 뻗으며 옹알이를 했고, 우리는 그런 아이를 달래가며 작품을 감상했다. 그런데 문득 생각했다. 이 아이에게는 지금 무엇이 아름다워 보일까?
미술관을 나오는 길에 아내와 이런 대화를 나눴다. 미에 대한 기준은 과연 누가 정하는 것일까. 그리고 그 기준은 얼마나 절대적인 것일까.
내가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떠올려본다. 비 오는 날 창문에 맺힌 물방울, 아침 햇살이 거실 바닥에 그려내는 기하학적 무늬. 이런 것들이 나에게는 아름답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어떨까. 그들도 같은 것들에서 아름다움을 느낄까.
요즘 SNS를 보면 '인스타그램용' 미학이라는 것이 있다. 완벽하게 배치된 음식 사진, 화려한 조명 아래 찍힌 셀피, 세심하게 연출된 일상의 장면들. 많은 사람들이 좋아요를 누르고, 댓글을 단다. 그것도 하나의 미적 기준이다. 하지만 나는 때때로 그런 완벽함에서 오히려 어색함을 느낀다.
진짜 아름다운 것은 불완전함에 있는 것 같다. 아이가 수박을 먹으며 얼굴과 손을 온통 빨갛게 물들이는 모습, 아내가 아침에 부스스한 머리로 커피를 마시는 뒷모습, 베란다에 널린 빨래가 바람에 펄럭이는 소리. 이런 것들에서 나는 어떤 필터도 거치지 않은 순수한 아름다움을 본다.
미의 기준은 시대에 따라 변한다. 과거에 아름답다고 여겨졌던 것들이 지금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고, 지금 우리가 추구하는 미적 가치들도 미래에는 낡은 것이 될지 모른다. 그렇다면 과연 영원한 아름다움이라는 것이 존재할까.
나는 그것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박물관이나 갤러리에 걸린 명작들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일상 속에, 아주 평범한 순간들 속에 숨어있다. 문제는 우리가 그것을 알아보는 눈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며칠 전 점심시간에 사무실 창밖을 내다보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바쁘게 지나다니는 길거리에서, 한 노인이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그의 걸음걸이에는 서두름이 없었고, 때때로 멈춰서 주변을 둘러보기도 했다. 그 모습에서 나는 어떤 아름다움을 보았다. 시간에 쫓기지 않는 여유로움, 세상을 바라보는 차분한 시선. 그것들이 만들어내는 조화.
하지만 같은 장면을 본 다른 사람은 그냥 '느린 노인'이라고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미를 감지하는 능력은 개인차가 있다. 그리고 그것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기를 수 있는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아이를 키우면서 새롭게 발견한 것이 있다. 아이들은 어른들이 놓치는 아름다움을 본다. 바닥에 떨어진 나뭇잎의 모양, 물웅덩이에 비친 하늘, 비누방울이 터지는 순간의 무지갯빛. 이런 것들에 아이들은 경탄한다. 어른이 되면서 우리는 점점 그런 순수한 감각을 잃어간다. 효율성과 실용성이라는 이름으로.
미적 감각을 기른다는 것은 결국 세상을 보는 시선을 다듬는 일이다. 빠르게 지나치던 것들을 천천히 바라보고, 당연하게 여기던 것들에서 특별함을 발견하는 능력.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만의 기준을 갖는 용기.
남들이 아름답다고 하는 것을 따라 아름답다고 말할 필요는 없다. 남들이 별로라고 하는 것을 굳이 좋아하지 않는 척할 필요도 없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진정으로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이다.
요즘 나는 아내와 함께 아이에게 다양한 것들을 보여주려고 노력한다. 책의 그림, 음악, 자연의 풍경, 일상의 소소한 순간들. 아이가 자라면서 자신만의 미적 기준을 갖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다른 사람의 시선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이 진짜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되기를.
미의 기준에 정답은 없다. 하지만 그것을 찾아가는 과정에는 의미가 있다. 세상을 더 세심하게 바라보게 되고, 일상에서 특별한 순간들을 놓치지 않게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만의 독특한 시각을 갖게 된다.
오늘 저녁에도 나는 아이를 목욕시키며 생각할 것이다.
물장난을 치며 웃는 이 작은 사람에게는 지금 무엇이 가장 아름다워 보일까. 그리고 나는 그 순간 자체가 아름답다고 느낄 것이다.
완벽하지 않지만, 바로 그래서 더욱 진실한 그 순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