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백산의 초여름

by 생각의정원

오전 7시 30분.

나는 소백산 등산로 입구에 서 있었다.

가방 속 텀블러에서 예가체프 아이스커피가 얼음과 부딪치는 소리가 작게 들렸고, 바나나 두 개와 삶은 달걀이 함께 흔들리는 소리도 났다. 초여름의 공기는 아직 차갑지도 덥지도 않은, 그 애매한 온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소백산은 내게 특별한 산이다. 처음 이 산을 만난 건 우연이었지만, 이후로는 계속 이곳을 찾게 되었다. 혼자 오르기에 딱 좋은 산이었다. 너무 높지도 낮지도 않고, 너무 험하지도 순하지도 않은. 마치 나와 비슷한 성격의 산 같았다.


등산로 옆으로 짙푸른 고사리들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그 사이로 가끔 지나가는 다람쥐 한 마리가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나무 위에서는 박새 한 쌍이 짧고 날카로운 소리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들의 소리는 소백산만의 독특한 음악이었다.


다른 산에서는 들을 수 없는.


발밑으로는 이름 모를 보라색 꽃들이 길가에 소담스럽게 피어있었다. 작고 수줍은 꽃들이었지만, 어떤 화려한 정원의 꽃보다도 아름다워 보였다. 소백산의 토양이 키워낸 꽃들이라서 그런 걸까. 이 산만의 특별한 무언가가 그들에게도 스며들어 있는 것 같았다.


한 시간쯤 걸었을까, 중간 휴게소에서 바나나 하나를 꺼내 먹었다. 그 순간 작은 나비 한 마리가 내 옆을 지나갔다. 흰색 바탕에 검은 점이 있는 배추흰나비였는데, 그의 비행은 마치 소백산의 능선을 따라 춤을 추는 것 같았다. 이 산을 너무도 잘 아는 듯한 자연스러운 움직임이었다.


더 올라갈수록 풀의 색깔이 진해졌다. 초록이 아니라 거의 검푸른색에 가까웠다. 소백산 특유의 진한 녹색이었다. 그리고 그 사이사이로 노란 민들레들이 별처럼 박혀있었다. 민들레를 보면 항상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하지만 소백산의 민들레는 어딘지 더 야생적이고 생명력이 넘쳐 보였다.


이 산을 오를 때마다 나는 혼자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하지만 외롭지 않다. 소백산이 함께 있기 때문이다. 이 산은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좋은 친구 같다. 아무 말 하지 않아도 이해해주는, 그런 친구.


정상으로 향하는 마지막 구간에서 까마귀 한 마리가 내 앞을 가로질러 날아갔다. 그의 날갯짓은 무겁고 여유로워 보였다. 마치 이 산을 수없이 오르내린 경험이 있는 것처럼. 나도 언젠가는 저 까마귀처럼 소백산과 친숙해질 수 있을까 싶었다.


정상에 도착했을 때는 11시 45분쯤이었을까. 삶은 달걀 껍질을 까며 나는 소백산 정상에서만 느낄 수 있는 그 독특한 감정에 젖어들었다. 성취감이기도 하고 평온함이기도 한, 형언하기 어려운 감정. 이것이 바로 내가 계속해서 이 산을 찾는 이유였다.


정상에서 내려다본 세상에는 수많은 녹색들이 겹겹이 쌓여있었고, 그 사이로 작은 개울이 은색 실처럼 흘러내리고 있었다. 소백산이 품고 있는 모든 생명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이 장관을 혼자 보고 있다는 사실이 때로는 아쉽기도 하지만, 때로는 특권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바람이 불었다. 초여름의 소백산 바람은 다른 어떤 바람과도 달랐다. 부드럽지만 확고했고, 시원하지만 따뜻했다. 이 바람 속에는 소백산의 모든 계절이 담겨 있는 것 같았다. 봄의 새싹, 여름의 무성함, 가을의 단풍, 겨울의 설경까지.


하산길에서 또 다른 나비를 만났다. 이번에는 주황색 바탕에 검은 무늬가 있는 나비였다. 그 나비는 한참 동안 내 앞을 날아가다가 어느 순간 숲 속으로 사라조다. 마치 소백산이 보내준 작은 선물 같았다.


텀블러 속 커피 한 모금을 마시며, 나는 이 산에 대한 애정이 점점 깊어지고 있음을 느꼈다. 소백산은 내게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다. 그저 언제든 와도 좋다는 듯 문을 열어두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매번 새로운 선물을 준비해두고 기다린다. 오늘은 보라색 꽃과 나비들이었다.


혼자만의 산행은 그렇게 끝났다. 하지만 소백산에서의 시간은 결코 끝나지 않는다. 일상으로 돌아가서도 문득문득 이 산이 그리워질 것이다. 그리고 또다시 이곳을 찾게 될 것이다. 계절이 바뀌어도, 내가 바뀌어도, 소백산은 늘 그 자리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어쩌면 사랑이란 이런 것일지도 모른다.

조건 없는 기다림과 변함없는 포용.

소백산이 내게 가르쳐준 사랑의 의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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