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는 것들

by 생각의정원

언제부터 연필을 깎지 않게 되었을까?


책상 서랍 깊숙한 곳에서 낡은 연필깎이를 발견했다. 초록색 플라스틱 몸체, 작은 날, 그리고 투명한 뚜껑 안에 고여 있는 오래된 연필 가루. 손에 쥐는 순간, 묘한 감각이 되살아난다. 연필을 넣고 돌릴 때의 그 감촉, 드드득 드드득 하던 소리, 깎인 연필 끝의 매끈함.


그런데 지금 내 책상 위에는 연필이 없다. 볼펜도 거의 쓰지 않는다. 노트는 몇 달째 첫 장이 그대로다. 모든 것이 화면 속으로 들어갔다. 메모도, 일정도, 편지도. 손끝이 종이를 만지는 대신 유리를 스친다.


문득 떠오른다. 예전에는 연필 없이 하루를 시작할 수 없었다. 학교에 갈 때, 필통 속 연필을 세어보던 습관. 시험 전날 밤, 새 연필을 정성스럽게 깎던 의식. 공부하다가 연필심이 부러지면, 다시 깎으러 교실 뒤로 가던 그 짧은 휴식. 연필은 단순한 도구가 아니었다. 그것은 하루의 리듬이었다.


서랍을 더 뒤진다. 오래된 다이어리가 나온다. 손때 묻은 표지, 구겨진 모서리. 펼쳐보니 내 글씨가 빼곡하다. 일정, 메모, 낙서, 전화번호. 어떤 페이지는 커피 얼룩이 있고, 어떤 페이지는 찢겨져 있다. 이 모든 흔적이 그때의 나를 말해준다.


지금은 모든 것이 깔끔하다. 스마트폰 속 메모는 지울 수도, 수정할 수도 있다. 흔적이 남지 않는다. 실수도, 망설임도, 고쳐 쓴 자국도 없다. 완벽하다. 그런데 왜일까. 이 완벽함이 때로는 공허하게 느껴지는 것은.


책장에서 오래된 편지를 꺼낸다. 친구가 보낸 것이다. 십 년도 더 된. 삐뚤삐뚤한 글씨, 군데군데 지운 흔적, 잉크가 번진 자국. 종이를 만지면 그때의 촉감이 손끝에 전해진다. 이 편지를 쓴 친구의 손이 이 종이를 만졌다는 것. 그 생각만으로도 이 편지는 특별하다.


요즘은 누구에게도 편지를 쓰지 않는다. 메시지를 보낸다. 빠르고 편리하다. 하지만 나중에 다시 읽을 때, 그 메시지에서 손의 온기는 느껴지지 않는다. 화면 속 글자는 차갑다. 균일하다. 누가 썼든 같은 폰트, 같은 크기. 개성이 없다.


물론 편리함을 부정할 수는 없다. 연필을 깎지 않아도 되고, 잉크가 번지지 않고, 지우개 가루를 털어낼 필요도 없다. 수정도 자유롭고, 검색도 가능하고, 백업도 된다. 객관적으로 보면 모든 면에서 나아졌다.


그런데 잃어버린 것도 있다. 연필을 깎으며 생각을 정리하던 시간. 노트에 글을 쓰며 느끼던 종이의 질감. 펜을 쥔 손의 무게. 천천히 글자를 쓰며 내 생각이 구체화되는 그 과정. 디지털 세상에서는 생각이 즉시 타이핑된다. 손과 종이 사이의 그 찰나의 간격이 사라졌다.


어쩌면 그 간격이 중요했는지도 모른다. 생각과 표현 사이의 그 짧은 시간. 연필을 종이에 닿게 하고, 첫 획을 긋고, 한 글자씩 써 내려가는 동안 생각은 더 명확해졌다. 서두르지 않았다. 천천히, 신중하게. 한 번 쓴 것은 지울 수 없었으니까.


손으로 쓴 글자에는 그 사람이 담긴다. 글씨체, 필압, 속도. 급하게 쓴 날과 여유롭게 쓴 날이 다르다. 화난 날과 평온한 날도 다르다. 손글씨는 거짓말을 할 수 없다. 그날의 감정, 그날의 상태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연필깎이를 다시 서랍에 넣는다. 아마 오랫동안 쓰지 않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다시는 쓰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버리지는 않는다. 이것은 단순한 도구가 아니다. 이것은 한 시대의 증거다. 내가 한때 그런 방식으로 살았다는 증거.


세상은 변한다. 더 빠르게, 더 편리하게. 새로운 것이 계속 나타나고, 오래된 것은 사라진다. 그것이 진보라고들 한다. 아마 맞는 말일 것이다. 하지만 가끔은 이렇게 서랍을 열어본다. 연필깎이를, 오래된 다이어리를, 손으로 쓴 편지를. 그것들을 만지며 생각한다.


우리가 얻은 것과 잃은 것에 대해. 속도와 여유에 대해. 편리함과 의미에 대해.


그리고 깨닫는다. 중요한 것은 옛것을 붙잡는 것도, 새것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중요한 것은 기억하는 것이다.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 무엇을 소중히 여겼는지. 그 기억 속에서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찾는다.


사라지는 것들은 완전히 없어지지 않는다. 그것들은 우리 안에 남아, 우리가 누구인지를 형성한다. 연필로 공부하던 아이가 있었기에, 지금 키보드를 두드리는 내가 있다. 손으로 편지를 쓰던 사람이 있었기에, 메시지 너머의 마음을 읽을 줄 아는 내가 있다.


변화를 받아들이되, 기억은 간직하자. 그것이 우리가 인간으로 남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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