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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잭 슈렉 Jun 01. 2024

오래된 물건

지은지 40년이 훌쩍 넘은 오래된 개량한옥을 허물고 좁고 높은 다세대 3층 집을 지을 때였다. 가구라고 말하기도 어려울 그야말로 세간살이는 모두 버렸고, 얼마 안 되는 새 가구들이 집을 채웠다. 간식으로 드시던 양갱도 늘 있었고, 상처가 나면 뿌려주시던 갑오징어 뼛가루도 있었던 낡은 할머니의 반닫이 장은 다른 세간살이들과 함께 버려졌다. 할머니는 어땠을지 몰라도 나만큼은 그것을 꼭 간직하고 싶었는데 너무 어려서 발언권조차 없었다. 


가끔 서양 영화를 보면 할머니가 물려주신 가구들에 대한 애정 어린 시선을 보곤 한다. 영화적 허구인지 사실인지는 모르나 물려주고 물려받는 행위를 나는 오래전부터 즐겼는지 모른다. 오래된 물건에 애정을 담고 친구인 양 늘 곁에 두면서 같이 나이를 먹는다는 건 왠지 모르게 낭만적이고 또 인간적이란 생각이 든다. 


그야말로 모든 가구들을 새로 마련했다. 가전제품도 마찬가지였다. 신혼살림이니 무리도 아니었다. 하나 불과 4년이 지난 어느 날, 아내는 내게 화장대를 버려야 한다 했다. 알고 보니 서랍장 2개의 레일이 어긋난 것이었다. 대수롭지 않게 반응했고 주말에 을지로에 다녀왔다. 튼튼한 레일을 사왔고 쩡한 것까지 서랍 모두의 레일을 교체했다. 그야말로 새것이 되었다. 그때 아내가 지어 보인 그 묘한 뿌듯함과 남자로서 날 인정해 주는 분위기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사용한 지 딱 10년째 되던 해에 냉장고와 오디오가 사망했다. 인생 3 막을 준비하시던 고모께서 사놓고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TV를 주셨기에 감사한 마음으로 받았다. 그리곤 그 어떤 변화도 없었다. 무려 17년간, 가스레인지 오븐레인지 그리고 모든 가구들을 아직까지 사용하고 있다. 그러던 중 세탁기가 결국 말썽을 일으켰다. 고장은 아니지만 17년을 계속 사용하고 나니 결국은 자연의 섭리에 따르듯 교체할 시점이 온 것을 나도 아내도 인식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4~5년 전, 동네 할머니께서 지방으로 이사하면서 두고 가신 3.5kg 용량의 아기용 세탁기를 엄마께서 확보하여 주셨기에 본진 세탁기가 아직까지 버텼던 것이다. 그리하여 오늘 오후 3시. 17년 된 세탁기와 아쉬운 작별을 고하게 된다. 새 녀석이 들어오는 만큼 세탁기 두는 공간을 꼼꼼히 청소하니 온몸이 땀이다. 세탁기 안에 텀벙! 들어가 씻고 싶은 마음이 잠깐 들었다. 


그러고 보니 아버지는 할아버지와 함께 나전칠기를 가내수공업으로 오래 하셨다. 물려받고 싶었으나 물려줄 컨디션이 되지 않은 아버지는 여러 차례 고사하셨다. 그때 아버지의 기술을 물려받았다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애정 어린 시선과 사랑을 받을 오래될 가구를 만들고 있었을지 모른다. 


할머니의 반닫이 장을 열 때 맡을 수 있던 냄새가 아직도 기억이 난다. 곱게 접은 한복과 양갱 냄새가 문을 잠시 열고 닫는 것만으로도 날 설레게 했다. 하나도 아프지 않은데 괜히 아픈척하면서 갑오징어 뼛가루를 뿌려줄 때의 순간도 생생하다. 할머니 품에 안기면 할머니 냄새가 진동했다. 


오래된 기억은 오래된 물건과 함께 오랫동안 기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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