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말 어느 날, 음악 동호회에서 한 해를 마감하는 연말 모임을 하자고 했다. 그러자 동갑내기 여자 사람은 '와! 그럼 우리 파티하는 거야?'라고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당황스러울 정도로 너무나도 해맑게 웃었던 친구 앞에서 엉거주춤 대답한 꼴이 그땐 몹시 부끄러웠다. 파티라니... 그런 거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었다.
국민학교를 토요일까지 열심히 다녔던 시절, 좋아하는 여자아이가 생일을 맞아 몇몇 친구를 초대했다. 물론 나는 보기 좋게 초대받지 못했다. 주말이 지나 월요일 학교에선 그 아이 생일파티에 대한 이야기가 제법 들렸다. 성냥팔이 소녀가 성냥 하나로 어떤 풍경을 보았다면, 나 또한 그날 아이들의 이야기로 그 풍경을 제법 자세하게 상상해 볼 수 있었다.
잔치라고 하기엔 뭔가 현시대와 그 꼴을 좀 달리하는 것 같다. 결혼식도 각종 행사도 전통보단 서양의 그것을 닮아 있는 시대라 그런지 언제부턴가 '파티'라는 단어가 내 입에도 종종 오른다. 제법 규모가 큰 행사를 기획하고 행사 후 조촐한 식음료를 즐기는 흔히 말하는 리셉션까지도 업무로 이어지나, 여전히 그곳에서의 내 모습은 꿔다 놓은 보릿자루 딱 그 모습이다.
풍족하지 못했던 어린 시절을 비난하는 필요까진 없으나 자란 시대가 시대인 만큼 파티는 여전히 의식의 흐름 어디에도 그 기원을 찾을 수 없는 이질적 단어다. 하나 아내를 만나 결혼을 하고 두 아이가 태어나 아빠가 된 이후, 그러니까 그때로부터 20년은 충분히 더 지난 지금에 이르러서 나는 비로소 파티를 흉내 내 보곤 한다.
유난을 떨며 부산스럽게 유치한 장면을 만들지는 않으나, 각종 색상의 풍선을 부는 것만으로도 이미 난 설렌다. 화려한 조명과 정돈된 음식들 사이에서 활짝 웃는 아이를 바라보는 것은 아빠가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행복이다. 종종 일상에 지치고 힘들 땐 그 당시 사진을 들춰보는 것만으로도 힘을 얻는다. 추억은 기록되어 다시 내게 에너지가 되어준다. 순간의 고통과 피곤함은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는 이유기도 하다.
초등학교 3학년 둘째 아이가 얼마 전 친구의 생일파티에 다녀온 이후 내년 생일에 자기도 파티를 꼭 하고 싶다고 부푼 꿈을 발표했다. 그간 충분히 만족스러운 시간을 꾸몄으나 결국 끊을 수 없는 그 매력적인 퍼포먼스에 현혹되고 만 것이다. 앞서 열린 생일파티 장소의 비용부터 어림잡아 계산해 보니 그다지 미소는 지어지지 않는다. 조금 더 알뜰한 퍼포먼스를 미리 대비해야만 한다.
돌이켜보니 세기말 겨울 우린 제법 즐거운 파티를 경험했었다. 음악 감상회를 매달 열었던 홍대의 클럽을 하룻밤 빌렸고, 그곳에서 밤새도록 음악과 춤과 술과 대화를 나눴다. 150만 화소 디지털카메라에 담아둔 사진은 차마 부끄러워 들여다보지는 않았다. 둘째의 포부를 시작으로 물꼬를 튼 오래전 기억이 떠오른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웠다.
매일매일을 파티가 열리듯 즐거운 마음으로 살아야 할 것이다. 아무도 보지 못할 고깔모자를 쓰고, 그 누구도 듣지 못할 즐거운 멜로디를 흥얼거리자. 아침에 눈을 떠서도, 출근하는 길에도, 퇴근해서 온 가족 다 같이 저녁을 먹을 때에도 매 순간을 파티로 꾸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