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가은 감독이 직접 대본과 감독을 맡은 두 작품 <우리들>과 <우리집>은 묘하게 닮아 있다. 남매와 누나의 친구, 그리고 자매와 우연히 만난 동네 친구 아이. 도합 세 명의 아이들이 햇살보다 더 찬란하게 반짝거리며 어느 때를 이야기한다. 셋의 나이를 다 합쳐도 30이 안 될 정도로 어리지만, 그들의 세계에는 우주보다 더 클법한 고민과 상처가 놓여 있다. 때문에 우리는 자칫 어린아이들이라 해서 쉽게 지나칠 수 있는 그 순간을 고맙게도 두 편의 영화를 통해 마주할 수 있게 된다.
http://www.cine21.com/movie/info/?movie_id=47299
4학년. 저학년은 아니지만 고학년이라고 하기엔 아직 한없이 어린 나이다. 1학년 때 같은 반으로 잘 지냈던 친구가 은따를 시키는 걸 알면서도 묵묵히 견디고 또 참아낸다. 말썽쟁이 남동생을 격렬하게 보살피고, 돈 버느라 바쁜 맞벌이 부모님을 대신해 장녀 노릇을 톡톡히 한다. 그러던 중 여름방학식 날 전학 온 친구와 방학 내내 달콤한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별것 아닌 일들이 두 소녀 사이에 등장하고, 전혀 문제 될 것 없는 이해충돌이 빈번하게 일어난다. 감정의 남용.. 상대에 대한 배려.. 무엇보다 지켜야 할 가족이 있는 입장과 더 이상 지킬 수 없는 가족을 관망할 수밖에 없는 입장의 차이는 무서울 정도로 극명하게 엇갈린다.
행복이란 철저하게 풍족한 자본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어른들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소녀들에게 있어 행복은 돈 몇 푼으로 따질 수 있는 가치 범위 밖에 놓여 있다. 무엇보다 더 이상 만들어낼 참기름 짜듯 짜낼 감정이 남아있지 않은 시점에서 결국 선택한 유일한 방법은 동화다. 동화되고 이해하고 교감하기 위해 먼저 손을 내미는 단발머리 소녀의 어색한 웃음은 내 마음을 쿵! 하고 내려쳤다.
더욱이 맨날 쥐어터지기만 하는 남동생이 아무렇지도 않게 건네는 한마디 말은 인류가 이룩해온 문명세계에서 수도 없이 벌어진 사건사고 전쟁과 탐욕스러운 행태들을 유머러스하게 꼬집는다. 한대 맞는다고 복수하고 또 복수하고 자꾸 복수하면 도대체 언제 노느냔 말이다. 꼼꼼한 서사에서 의도적으로 설치한 장치인 것을 알면서도 뭉클한 것이 가슴으로부터 피어올랐다.
http://www.cine21.com/movie/info/?movie_id=54147
그렇게 소녀들과 남매가 만들어낸 <우리들>의 세계는 감독의 차기작 <우리집>에서 조금 더 확장된 세계관을 보여준다. 철저한 자본주의 시스템에 맞물린 채 허덕이는 가정이 있다. 이사라고는 하지만 쫓겨나는 모양새다. 도대체 이 넓은 세상에 '내 집'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소녀들은 고민하고 탐구한다. 그리고 그들만의 '집'을 갖기 위해 그리 멀지 않은 여정을 떠난다.
피구 놀이, 생일파티, 문방구 등 일상에 있는 소재들을 갈등과 복선의 장치로 사용한 <우리들>에 비해 <우리집>은 오로지 앞만 보고 질주한다. 과연 이 소녀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집을 얻으리라는 생각은 관객이라면 그 누구도 안 할 것만 같다. 그런 시시콜콜한 해피엔딩 영화라면 아마 감독도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슬픈 결말 혹은 열린 결말 그 어디쯤이란 것을 빤히 알면서도 결국 소녀들의 막무가내 가출기를 지켜볼 수밖에 없는 우리는 미안하게도 이미 어른이란 이름을 갖고 있다.
단란한 네 식구 가족이 모여 밥 한 끼 먹는 게 소원일 뿐인데 그마저도 이루기 힘든 세상.
등기부등본 이름 석자 박혀있고 재산세 내며 나란히 누워 한 방에서 자더라도 내 집이 있는 세상.
왕따시키고 돈 몇 푼에 친구끼리 선그어가며 생활하지 않는 그야말로 행복한 유년 시절이 물결치는 세상.
그런 세상은 과연 없는 것일까.
<우리들>이 지은 <우리집>은 스크린으로만 볼 수밖에 없는 것일까.
만나보고 싶다. 감독의 차기작을 통해. 어른이란 이름표를 뗀 나 스스로를 통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