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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잭 슈렉 Jul 26. 2024

늙어가고 있다.

강원도 오지에 거주하는 어르신의 집으로 진료를 떠나는 왕진 의사는 그의 책 소제목을 통해 '우리는 운이 좋으면 노인이 된다'라고 말했다. 무슨 뜻인가 하고 의구심을 갖고 읽어나갔고, 몇 페이지 안되는 내용을 모두 읽고 나서는 어쩌면 노인이 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축복을 받은 일이 아닐까 하고 생각을 하게 됐다. 


그도 어디선가 듣고 보고 생각한 것들을 그렇게 정리했을 거라 믿는다. 해철이 형이 일찍이 말하길 '우리는 태어난 것만으로도 이미 행운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이후는 마음껏 즐기면서 살아야 한다'라고 일갈했다.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 태어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이렇게 태어나 숨 쉬며 살아가고 있다. 


뼈가 튼튼해지고 근육이 성장하고 아이에서 청년으로 멋있게 성장하는 20년 남짓의 시간은 판단력과 자아가 옹골차게 익어나가는 과정이다. 육체적 성장이 정점에 다다른 이후부터는 늙고 병들어가며 죽음을 향한 하향 곡선에 강제적으로 탑승하게 된다. 많은 시행착오를 통한 올바른 사고 능력과 판단력의 정확성은 그 대가로 나쁘지 않아 보인다. 


나이가 많이 든, 이른바 노인 세대를 향한 젊은 세대의 시선은 어느 시대나 곱지 않았다. 아직 늙어보지 못했기 때문에 경험하지 못한 영역에 대한 원초적 두려움 혹은 젊음이라는 무기를 온몸에 장착한 기만이지만 나도 그땐 그랬다. 그리고 단 한 번 젊은 시절을 겪어본 노인들은 그들의 시선이 달갑지 않으면서도 거스르거나 반론을 펼칠 의지를 쉽게 드러내지 않는다. 이미 젊어봤고 또 늙어봤기 때문에 어쩌면 말을 아끼거나 수긍하는 입장일지 모른다. 


아날로그라는 단어조차 언급하기 힘든 그야말로 옛날이 불과 백여 년 전이었다. 부모님 세대가 성장의 발판으로 삼았던 한국전쟁 이후 아날로그의 시대는 21세기의 시작과 함께 디지털로 모든 분야를 양보했다. 사소한 것 하나 느린 것이 없다. 빠르고 신속하고 압축하고 요약한 시대에 이르렀다. PC는 고사하고 스마트폰의 기능 하나 쉬운 것이 없다. 인력을 줄이기 위한 수단으로 등장한 키오스크는 매장마다 사용법이 달라 나조차도 간혹 머뭇거리게 만든다. 



건건이 은행 창구를 방문하는 일은 눈에 띄게 줄었다. 폰뱅킹에서 바통을 넘겨받은 인터넷 뱅킹과 스마트뱅킹은 출퇴근길 지하철에서도 거주하는 집 보증금을 주고받을 수 있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익숙하지 않은 노인들에겐 여전히 평일 한낮 은행을 쉼터이자 전기료 납부를 위해 30분은 족히 대기를 해야 하는 진풍경을 만들었다. 자동이체조차도 어려워 매달 공과금 납부를 위한 발걸음을 아끼지 않는 풍경은 태어나자마자 스마트폰을 손에 쥔 세대의 눈에는 과연 어떻게 보일까. 


누구의 책임도 누구의 어깨에 감당하라 올리는 짐도 아니다. 다만 기술의 정점이 지나치게 세련되고 속도의 결괏값으로 매겨지는 세태가 이젠 내게도 벅차기 시작하는 것이 씁쓸하다. 우리나라 평균 수명의 반을 족히 살아온 나 역시 살아온 날 보다 살아갈 날이 훨씬 줄어든 시점에서 잘 늙고 건강하게 죽을 수 있는 준비를 하게 된다. 


굳어버리진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책을 읽는다. 피아노는 멀리 두었으나 대신 손가락 끝에 둔 키보드 자판의 능숙함을 위해 틈틈이 연필 대신 잡는다. 몇 주만 시선을 두지 않아도 늘 오고 가는 길목에 새로운 건물이 생긴다. 그곳의 가게는 지금까지 내가 본 그것들과 비슷해 보이나 또 다르다. 돈이 없어서는 분명 아닌데 들어가기 머뭇거려지는 건 이미 나도 늙었다는 반증일 것이다. 


어머니의 종잣돈 관리를 위해 어머니를 모시고 일찌감치 우체국을 방문했다. 보이스피싱 아닙니다. 막내아들이에요,라고 나를 소개하고는 업무를 보는 내내 바로 옆 창구에서는 할머니 몇 분이 차례대로 업무를 보면서 진땀을 흘리고 계신다. 우체국 직원이 불친절해서가 아니다. 그분들의 자식이 바빠서가 아니다. 세상은 이미 늙은 이들에겐 그리 친절하지 않은 시대로 탈바꿈 한 까닭일 것이다. 


늙어가고 있다. 우리는 모두 늙어가고 있다. 

편리해지는 것은 분명 좋은 일이지만 마냥 좋다고만은 볼 수 없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말 그대로 남녀노소 모두가 공존할 수 있는 눈높이가 필요할 것이다. 


그 눈높이는 가장 높은 곳보단 기준 점에서 조금 낮은 곳. 그곳으로 영점을 맞췄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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