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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잭 슈렉 Aug 03. 2024

<플랜 75> 시작이 있는 모든 것들엔 끝이 있다.

초등학교 3~4학년 때쯤이었다. 교과서에서 배운 고려장 이야기는 정말 너무나도 무서웠다. 집에 계시는 할머니 생각에 도저히 감정이입할 수 없는 일이었다. 훗날 그것이 우리의 전통이 아닌 일본의 것이란 사실에 한 번 더 놀랐다. 이유 불문 늙은 부모를 내다 버리다니! 지금도 여전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플랜 75> 우리보다 조금 먼저 저출산과 초고령 사회에 들어선 작품이다. 제작 국가가 일본이라 역설적으로 더 놀랍다. 한편으론 이제 우리가 일본보다 더 심각한 초고령 사회에 접어드는 분위기에 마냥 영화만으로 볼 수 없는 현실이 두렵다. 봐야 할지 말아야 할지. 머뭇거리기를 몇 달. 그리고 결국은 영화를 관람했다. 


자녀 없이 남편을 먼저 보내고 혼자된 할머니가 등장한다. 노동을 즐기는 듯 보이나 수입이 없으면 당장이라도 휘청거릴 빠듯한 살림이 이어진다. 동료가 일터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함께 과일을 깎아 먹고 웃으며 일상을 보내는 이웃들의 현실도 크게 다를 바 없다. 그리고 어느 날 그녀 앞에 <플랜 75>라는 새로운 사회 제도가 등장한다. 75살이 넘으면 국가가 나서서 임종을 도와주겠다는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기가 찰 노릇인데, 더럽고 추잡한 자본주의의 논리를 밑바탕에 깔면 무리도 아니란 생각마저 든다. 


설명하고 싶지 않을 만큼 이기적인 격렬한 인트로가 지나면 잔잔한 일상의 드라마로 영화는 시작한다. 하지만 몇몇의 등장인물을 나열식으로 배치해 객관적인 입장을 고수하다가 어느 순간 그들로부터 가족과 이웃이란 관계를 통해 관련된 누군가로 입장을 틀어버린다. 객관화가 주관적이 되는 순간이다. 얼마 안 되는 기본 정보를 기입한 서류 한 장으로 삶과 죽음의 영역을 가로질렀던 어제와는 달리, 평생을 몇 번 보지 않은 삼촌의 죽음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일로 치밀어 오르고 만다. 



딸아이의 수술비를 위해 돈을 더 벌어야 하는 현실에 맞닥뜨린 외국인 노동자는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노인들의 소지품에 서서히 손을 뻗는다. 죄의식은 존재하나 영화는 그녀로부터 죗값을 묻지 않는다. 굳게 다문 입술과 흔들리는 동공만이 아직 그녀의 순수가 남아 있음을 드러낼 뿐이다. 


잔잔한 드라마는 중반부 이후 급격히 다큐멘터리의 화법으로 전환한다. 다큐라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소재라 더더욱 그 설정에 영리함이 느껴진다. 요약을 넘어선 거의 단절에 가까운 압축된 대사 그리고 길게 늘어질 정도로 보여주는 특정 장면의 지루함은 마치 작품 속에서도 시간은 이렇게 흐르고 있다고 외치는 것만 같다. 


절대 어느 한순간도 멈추지 않는 시간. 오늘의 젊음이 영원한 것은 아니다. 


시작이 있는 모든 것들에는 끝이 있게 마련이다. 태어난 모든 것들은 늙게 마련이고, 늙어서도 여전히 사람이고 생명이다. 젊은 세대에 비해 노동력이 낮다 해서 배척받아야 할 이유가 전혀 없는 사람들. 과거가 없는 현재가 없듯, 젊은 세대를 일궈낸 그들의 업적은 까맣게 잊혔다. 그저 경제지표의 평균을 깎아먹는 더 이상 쓸모없는 존재로만 인식된다. 영화 속 그리고 현실 속 젊은 세대들도 훗날 늙어질 텐데... 틀린 것을 부정하고 다른 것을 외면해버리는 이기적이고 몰상식한 편협한 계산 놀음이 이러한 영화를 이러한 세태를 만들지 않았나 싶다. 


때때로 영화는 비현실적이라 가능한 장르라 생각하고, 한편으론 지극히 현실적이기에 가치가 있다고도 생각한다. <플랜 75>는 그 누구도 비껴갈 수 없는 오늘과 미래 나와 우리 모두에 대한 눈앞의 고민에 대해 들려준다. 외면한다고 해서 피해 갈 수 없는 그것을 이야기한다. 


미리 준비하고 고민하고 인식해야 한다. 


<영화 자세히 보기>

http://www.cine21.com/movie/info/?movie_id=60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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