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이나 일산 등 신도시를 제외하면 대한민국 대부분의 도시는 뚜렷한 계획이나 목적성 없이 난립과 충돌 사이에서 점차 그 덩치만 키워왔다. 신도시도 시간이 흐르면서 초기 반듯했던 모습과는 달리 혼미한 상태를 종종 보이곤 한다. 총천연색 아크릴 간판과 어지러운 표지판, 사대주의에 찌든 영어가 거리를 빼곡하게 채운다. 원주민을 위한 공간인지 분간도 어려운 정체성 혼돈의 시대. 주거지역과 상업지역은 뒤섞이고 인간을 위한 도로는 진작 자동차에게 내준지 오래다.
새해 들어 나름 작은 주제를 기준 삼아 읽은 세 번째 도시 디자인 책은 '공생'과 '재생'을 주요 골자로 한다. 저자가 직접 발로 뛰어 참여하고 땀 흘리며 이룩한 여러 포트폴리오는 시사하는 바가 분명 크다. 주민은 물론 어린이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면서 동시에 죽은 공간과 다시 살려야 하는 공간에 대한 과감한 결정이 이어진다. 더욱이 낡고 오래된 것들을 단순히 폐기처분하고 새로운 것을 짓기 급급한 기존의 행정 시스템에 대한 일갈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모두가 함께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도시, 지역, 마을의 모습은 과연 어떤 풍경이 되어야 할까. 묵직한 이 질문에 대한 소박한 해답이 책에 가지런하게 소개된다.
아주머니 아저씨 어르신들까지 주민들이 모여 이뤄낸 워크숍의 풍경은 사진을 보는 것만으로도 설렌다. 행정과 주민, 그리고 전문가까지 결탁해 이루는 그 느리지만 뚜렷한 목표가 있는 발걸음은 목적지를 향하기 때문에 아름답다. 시공업체의 실수, 행정의 착오 등 여러 문제점도 발생하지만 또 그것을 이겨내고 해결하기 때문에 도시의 탈바꿈은 의미가 있다.
시들어 죽기 직전의 꽃이 마치 마법이라도 걸린 듯 새 생명을 얻어 활짝 꽃피우는 모습이라 하면 너무 과장된 것일까? 아무도 찾지 않는 길목의 어느 한적한 공간, 세월을 등지고 더는 사람들이 찾지 않는 공간, 죽은 건물에 심폐 소생술을 하고, 활용도가 낮은 특정 공간을 남녀노소 모두가 즐길 수 있는 사랑방으로 꾸며진다.
소개되는 모든 동네마다 그 매력이 색다르다. 지나치게 감상적이지 않고 예술가 적인 측면에서 허세만 부리는 디자인은 일절 언급하지 않는다. 그야말로 실용적인 하지만 동시에 미적 감각과 시각적인 안락함까지 이루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사레들을 마주할 수 있다.
관련해서 내가 거주하는 지역에도 최근 10년 사이 예쁘고 아기자기한 도서관, 학생들을 위한 시설들이 속속 만들어지고 있다. 거짓말 눈곱만큼도 보태지 않고 문 열 때부터 닫을 때까지 하루 종일 머물고 싶을 만큼 그곳들은 정말이지 아름답고 쾌적하다. 6미터는 족히 넘을 높은 층고에 동굴처럼 이어진 요소요소의 공간들이 제법 넓게 펼쳐진 도서관의 웅장함은, 누런빛의 습기 잔뜩 머금은 국민학교 도서관만 경험했던 지난 시절의 야속함을 일순간에 보상받는 느낌을 들게 한다.
10여 곳의 새롭게 꾸민 사례들에 이어 저자는 책의 후미에 이르러 '도시 재생을 위한 다양한 시도와 가치'라는 주제 아래 우리나라뿐 아니라 일본과 유럽 등의 사례를 짧게 다룬다. 관련하여 '능력이 없으면 손을 대지 않고, 원형을 남겨두는 것이 훌륭한 지혜이며 후손을 위한 배려이다'라고 강한 어조로 말한다.
꼼꼼하게 경제논리에 입각한 재개발도 아닌 것이, 건설 경기에 환장한 정치와 행정의 틈바구니에서 우린 그동안 얼마나 많은 보금자리와 추억을 담보 삼아 왔었는가 돌이켜볼 필요가 있다. 그렇다고 새롭게 오르는 건물이 시설이 지역과 자연과 환경과 조화를 이루는 것도 아니다. 기괴하고 흉물에 가까운 네모 반듯한 콘크리트 시설은 그 이면에 드리운 이해관계의 결과물로 초라하게 세월의 풍파를 맞곤 했다.
규모가 반드시 클 필요도 없다. 대규모의 자본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주민과 전문가 그리고 이를 뒤받쳐줄 행정이 같은 목표를 갖고 고민한다면 어느 곳이나 책에서 볼 수 있는 곳처럼 예쁘게 멋있게 효율적으로 달라질 수 있다. 하늘을 찌를 듯 높아야만 랜드마크가 되는 것이 아닌데, 몇 천몇 만 석의 공연장이 꼭 필요한 것도 아닌 마당에 결국 시스템은 아파트를 짓고 상가만을 지어 수익을 창출하고 유린하는데 급급하다.
공생과 재생의 의미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나아가 어느 정도 인프라가 갖춰진 국토 대부분을 소재 삼아 조금씩 조금씩 고민과 협력이 이뤄진다면, 모두가 함께 살아가는 '공생의 멋'이 깃든, 그리고 기존의 시설을 적극 활용하는 '재생의 맛'이 담백하게 느껴질 좋은 공간이 만들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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