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탠리 큐브릭 ㅣ 진 D. 필립스 ㅣ 윤철희 ㅣ 마음산책
유치한 놀이지만 가장 좋아하는 영화감독을 꼽으라면 국내로는 봉준호 감독, 해외로는 스탠리 큐브릭 감독이다. 이견이 없다. 좋아함을 넘어서 존경의 경지에 이른 감독 두 분이다. 오래전 도서관 홈페이지 좋아하는 책 목록을 들춰보니 고맙게도 이 책이 가장 뒤에 담겨 있었다. 냉큼 상호대차를 신청, 읽어 내려갔다. 독특하다면 독특한 구조라 그를 이해하는데 더 큰 도움이 되었다.
영화감독으로 활동하면서 여러 매체와 인터뷰한 것을 연대기 순으로 나열한 구성은 그가 자신의 작품에 대해 그리고 영화감독이란 위치에 대해 얼마나 큰 애착을 갖고 있는지를 설명한다. 인터뷰의 시점이 가까워지면 더러 중복되는 내용도 등장하지만, 이는 한결같은 그의 고집과도 같은 부분이라 귀여워 보이기까지 한다.
흔히 그를 가리켜 천재라고 한다. 어떤 의미에서 천재라는 타이틀이 어울리는지는 짐짓 고민해 볼 필요가 있겠으나 그간 그의 작품을 여러 차례 반복하면서 본 시간과 더불어 이 책을 통해 조금 더 그를 알아가는 시간을 경험하니 그는 천재보단 묵직한 고집쟁이란 느낌이 더 강렬하다. 분업하고 취합함을 더 매끄럽게 했더라면 생전 그의 작품은 지금보다 더 많았을지도 모른다는 아쉬움이 가장 크다. 지독할 만큼 고집스러운 독서광과 연구광이 일궈낸 현재의 작품도 아쉬울 것은 없으나, 책 속에서 접할 수 있는 그의 사사로운 일화는 때때로 안타까움을 느끼게 한다.
감독 교체로 인해 <스파르타쿠스>의 감독 제의를 받고 수천 명에 이르는 엑스트라에게 일일이 숫자를 부여하여 동작 하나하나를 지시했었다.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도입부 유인원의 특수 효과를 위해 가면 제작에만 꼬박 1년을 몰두했다. 현지보다 10년 늦게 개봉한 <풀 메탈 재킷>의 국내 홍보문구를 영국에서 한국인 유학생을 섭외해 검수했다는 믿거나 말거나 일화. <샤이닝>에서 주방장 아저씨가 호텔 주방을 설명해 주는 장면을 무려 170여 회 이상 촬영했다는 이슈까지. 과연 그는 그만의 고집을 완벽하게 장악하고 연출하는 성과를 이뤄냈다.
서점에 방문하여 눈을 감고 아무 책이나 집어 들고 읽어 내려가기도 했고, 21세기에는 인간의 노화를 더디게 하고 어쩌면 영생을 이뤄낼 수도 있다고 믿었던 독특한 캐릭터의 인물이 바로 스탠리 큐브릭이다. 스필버그에게 물려주었지만 영화 <A.I.>를 그가 연출했다면 어떤 결과물을 관람할 수 있었을까. 여러 악조건 속에서 강행했으나 끝내 불발된 <나폴레옹>이 만들어졌다면 우리는 또 하나의 완벽한 역사극을 개인 최고의 필모로 손꼽게 되진 않았을까.
어딘지 모르게 조금 나태한 느낌의 몰골, 그러나 또렷한 눈빛, 지독할 만큼 친절한 설명과 이를 뒷받침하는 본인만의 고집과 철학이 책을 가득 메우는 인터뷰에 수시로 등장한다. 그래서 마치 책을 읽는 내내 나는 무려 60여 년 전으로 돌아가 기자와 큐브릭 감독이 앉은 테이블 옆에 친구의 자격으로 함께한 느낌마저 든다. 여담으로 그 시절에도 기자는 기자였는지 요샛말로 기레기스러운 질문들도 눈에 띄는 걸 보면 역시나 싶다.
천재라는 타이틀 아래 고집쟁이 다운 면모를 보여준 그가 이룬 가장 큰 업적은 한 편의 작품을 만드는 과정에 있어 감독이라는 역할이 갖고 있는 중요성을 시사했다는 부분이다. 제작사의 횡포에 맞서 싸울 수 있는 위치. 모든 촬영과 제작 그리고 편집 과정까지 함께하며 그야말로 기적에 가까운 업무량을 소화한 역량. 그래서 그가 만든 영화를 보면 단 한 컷도 소홀한 느낌을 받을 수 없는 그 장악력에 지배되는 느낌이 들게 된다.
작품을 소개하는 글에서 더 깊게 언급하겠지만, 그의 작품 중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단연 <샤이닝>이다. 모든 장면의 완성도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그 배경을 만날 수 있다. 작년에 원작 소설을 읽으면서 왜 그토록 스티븐 킹이 영화를 싫어했는지는 충분히 이해했으나, 감독 역시 왜 영화를 그렇게 만들었는지에 대한 해답도 이 책의 보너스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해일처럼 몰아치는 핏물 역시 한 번의 촬영 이후 9일간 세트를 청소하고 재촬영을 했다 하니, 어찌 컷 하나가 가볍게 보일 수 있을까.
롯데시네마가 코로나 이전 기획한 특별전을 통해 <시계태엽 오렌지>와 <샤이닝>을 스크린으로 볼 수 있었다. 일찍이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는 20대 초반과 후반에 한 차례씩 영화제를 통해 스크린으로 마주했다. <아이즈 와이드 셧>은 국내 개봉 당시 역시 극장에서 관람했다. 도서관에 그리고 교보문고에 얼마나 많은 그의 책이 있을지 아직 찾기 전이지만, 꾸준히 찾아가며 그의 이야기를 차근차근 더듬어 가야겠다. 수십 년 차이를 둔 과거의 감독의 역사를 되짚어보는 희열을 오랫동안 누려 나갈 것이다.
이 책은 그 시작을 알리는 계기가 되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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