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보며 얻을 수 있는 희열에는 여러 종류가 있을 것이다. 좋아하는 배우의 멋진 연기를 보는 것만으로도 감동에 벅찬 것은 물론, 숨어 있던 반전으로 깜짝 놀라며 쾌감을 느끼기도 한다. 신파라고는 하지만 서사에 빠져 목놓아 울기도 하고, 너무 무서워서 고개를 돌리지만 그러면서 동시에 끝까지 보고 마는 그 오묘한 호기심의 마력이 바로 영화, 즉 이야기의 힘이다.
그런 가운데 별다른 사건도 절정도 갈등도 없이 잔잔하게 마치 다큐멘터리처럼 흐르는 영화에게서는 어떤 희열을 얻을 수 있을까. 희열을 얻을만한 포인트가 없는 것이 그 영화의 감동 포인트라면 너무 억측이려나. 아니면 잔잔함에도 불구하고 바득바득 현미경으로 들춰 아주 작은 미세먼지 크기의 뭔가를 하나 끄집어 내서 자랑하면서 즐겨야 할까.
죽을 때까지 얼마나 많은 영화를 볼 수 있을지 감히 기대도 하지 않지만, 결국 내가 봐야 할 영화의 편수가 정해져있다면 최대한 실패 없이 영화를 고르고 골라야 할 나름의 책임이 느껴진다. 때문에 너무 개차반이라 반드시 봐야만 한다고 판단이 드는 영화도 있고, 컨디션 제대로 좋을 때 봐야 그 작품이 가진 아우라를 모두 받아들일 거라고 말도 안 되는 미신처럼 믿는 영화도 있다.
그런 가운데 지인의 추천으로 컨디션이 몹시 좋지 않은 어느 밤에 관람한 <노매드랜드>는 내게 모처럼 형용할 수 없는 감동, 희열을 선사한 작품이다. 그것도 영화 관람 도중엔 그 어떤 감흥도 받을 수 없었다. 솔직히 초반 30여 분은 너무 힘들고 지루해서 포기할 생각도 자주 했었다. 하지만 시작한 작품을 도중에 끊는다는 건 전혀 나답지 않은 일. 끝까지 관람을 이어갔고 그렇게 영화가 끝나서야 감독이 작품이 이야기가 내게 어떤 말을 던져주는지 조심스럽게 주워 담게 되었다.
한 여자가 있다. 직장이 폐쇄되고 남편의 사망 이후 밴에 몸을 싣고 곳곳을 떠다니며 하루하루를 버겁게 보낸다. 계절에 따라 여러 곳에서 일을 하며 그야말로 연명하는 수준의 삶을 살아가는 그녀는 때때로 같은 패턴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의 도움을 받기도 하고 또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기도 한다. 거주지가 정해지지 않았다는 사실 만으로도 그녀가 감당해야 하는 일상의 노곤함은 생각보다 크다. 노골적으로 위협하는 한겨울의 추위와 마땅한 용변조차 해결할 수 없는 자동차의 특성은 단 한 장면도 그녀에게 안락한 현실을 허락하지 않는다.
약 1년이 넘는 시간을 느림과 빠름의 호흡으로 비추는 영화 속에서 충분히 정착할 수 있고 또 새로운 기회를 붙잡을 수 있는 순간이 찾아오지만 그녀는 여전히 몇 년간 지켜온 고된 삶을 유지한다. 하물며 똥차가 된 밴을 차 값에 버금가는 금액을 지불하면서까지 수리해서 타고 다닌다. 동료의 실수로 깨져버린 접시를 접착제를 이용해 완성한다. 필요 없는 것은 나누고, 필요한 것은 시간을 두고 천천히 찾는다. 소유한 것이 적다 보니 잃을 것이 없다. 푹신한 침대보다 비좁은 밴에서의 잠을 더 쫓는다. 그녀는 과연 왜 그러는 것일까.
얼마 전 집주인이 전세 보증금을 올려달라고 했다. 3년 만의 보증금 인상. 다행히 알뜰하게 모아둔 저축으로 버겁게 해결했다. 햇수로 10년째 사는 집. 알뜰한 아내와 사랑스러운 두 아들이 살기에 더할 나위 없이 충분한 집. 가족이 모두 잠들고 자정에 가까운 시각. 100분 남짓 된 영화를 보고 있자니 여러 상념들이 머릿속을 채웠다.
이제 제발 그만두라고 마음속으로 여러 번 외쳤지만 부스스한 머리로 담배를 피워대는 화면 속 그녀는 내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고집스러운 홀로서기를 유지하면서도 동료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기꺼이 돕는 그 마음은 훗날 따뜻한 관심과 보살핌으로 그녀에게 돌아왔다. 비록 받아들이진 않았지만 그 과정과 흐름 속에서 왜 그토록 사람들로부터 도시로부터 일종의 규칙화된 시스템으로부터 멀어지고자 하는지 조금은 공감이 이뤄졌을까.
오랜만에 찾은 옛 직장과 직원 숙소로 제공받은 집에 이르렀을 때, 나는 잠시 잠깐 걸어온 어깨너머의 과거를 떠올리게 되었다. 무표정한 카메라, 결코 다가서지 않고 내내 일정 거리를 둔 시선은 그녀와 그녀를 바라보는 관객의 마음을 절대 따뜻하게 어루만지지 않는다. 어떤 희망적인 메시지를 던지지 않으나 그렇다고 불행할 거란 우려를 남기지 않는다. 반듯하게 뻗은 도로를 머뭇거림 없이 달려가는 밴의 질주로 영화는 마무리된다. 앞으로 잘 할 거야... 쓸쓸한 우려보단 다부진 희망의 각오가 자연스럽게 뒤따랐다.
너무 많고 복잡한 그야말로 여백 없이 일상을 가득 채우는 현실 속에서 <노매드랜드>는 여백과 빈 공간 그리고 고독과 연대에 대한 것들을 이야기한다. 결말에 이르기까지 특별하게 작용하는 복선도 없다. 의구심이 들만한 장면도 없다. 모든 것들이 자연스럽게 물 흐르듯 이어진다. 아무것도 입지 않은 채 계곡에 몸을 눕히고 하늘을 바라볼 때의 표정이 가장 행복해 보였다. 그 순간이 바로 그녀와 내가 하나로 동화되었다고 느껴져서 그럴까.
인스턴트는 고사하고 유기농 재료의 그 슴슴한 맛에도 미치지 못할, 잔잔하게 퍼진 물결 과도 같은 영화는 그렇게 내 안에 스며들었다. 한 번 더 관람하게 될지 의구심이 들지만, 그날 밤 영화를 보며 느낀 감정에 대한 기억만큼은 오랫동안 이어질 것만 같다. 잠시 소풍 나온 인생이란 여정에서 가끔 꺼낼 만큼 소중한 작품이 되었다.
<영화 자세히 보기>
http://www.cine21.com/movie/info/?movie_id=568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