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한 바퀴 - 태어나 지금까지 쭉 같은 동네에 살고 있다. 흡사 <싸구려 커피> 노래 가사처럼 내가 동네인지 동네가 나인지 가끔씩 헷갈릴 정도다. 그간 달라지고 바뀐 풍경들이 즐비하지만, 그래도 눈 감으면 그때부터 지금까지의 모든 장면들이 속속들이 깨알같이 떠오른다.
그때와 가장 많이 달라진 풍경이라면, 아파트가 숲처럼 들어섰다는 것이다. 재개발이란 거대한 자본주의 논리로 인해 살던 집과 인근 풍경은 송두리째 사라지고 월급만 평생 모아도 살 수 없을 분양가의 아파트들이 잔잔하던 물결의 동네 풍경을 헤집고 다닌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재개발의 첫 단추를 꿴 아파트 단지는 가히 신세계처럼 보였다. 둘이 나란히 걷기에도 좁은 골목길과 닳아빠진 보도블록, 그리고 하늘을 가로지르는 전깃줄이 빼곡했던 동네 바로 옆의 아파트 단지는 별일 없이 지나가기에도 부담 될 정도로 내겐 위압적이었다.
그해 겨울, 태어나 처음으로 수술이란 것을 하게 됐다. 나이가 어려 전신마취가 불가피했고, 수술실 앞에서 네 번째 숫자를 헤아리기도 전에 나는 깊은 잠에 빠졌다. 예쁜 간호사 누나도 좋았고, 한 살 차이로 어린이 병동에 입원하지 않은 것도 좋았다. 정확하게 시간 맞춰 나오는 병원 밥도 좋았다. 초중고 통틀어 급식을 경험하지 못한 내게, 그때 그 밥은 마치 급식과도 같았다.
그로부터 35년이란 시간이 흘렀고, 봄의 한복판 나는 다시 수술을 예정하고 있다. 수술 특성상 전신마취가 불가피하고, 이번에도 역시 네 번째까지 굳이 세지 않고서도 편히 잠들 수 있을 것 같다. 뭐든 자주 하면 익숙해지는 법, 전신마취에서 깨어날 때의 기분은 그야말로 달리 경험할 수 없는 오묘한 느낌을 들게 한다. 적당히 아프고 몽롱하고 불편하고 내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굳이 좋다고 할 필욘 없지만, 나름의 매력은 있다.
수술을 앞둔 휴일 아침, 햇살이 너무 좋아 일찍 집을 나섰다. 그리고 평소 자주 가지 않는 길을 따라 동네 한 바퀴를 구석구석 다녔다. 이미 사라지고 없는 집터지만 그곳으로부터 가장 가까운 언덕길을 따라 내려왔다. 친구 녀석들 살던 집이 대략 어디쯤인지 생생하게 기억이 났다. 초코파이를 준다고 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두어 달 다녔던 교회를 지나, 3~4년간 머리를 깎던 이발소도 들여다봤다. 꼭 운동화 신고 할머니보다 1시간 늦게 갔었던 방앗간에는 한복 집이 생겼다. 그마저도 재개발을 앞둬 빈 가게가 되었다. 소풍 가기 전날이면 엄마께서 주신 2천 원으로 풍성한 간식을 사던 구판장은 아직도 건재했다. 살던 집 바로 앞에 자주 가던 구멍가게가 있었지만, 구멍가게에서 100원짜리 과자를 구판장에서는 90원에 팔았었다. 2천 원으로는 도저히 외면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은방울 오락실, 해님 오락실, 문방구들, 떡볶이집, 친구네 부모님께서 운영하셨던 서점과 세탁소... 나 혼자 그때 그 시절 모든 추억을 소환해서는 마을잔치하는 기분이 들었다. 살던 집에서 천천히 걸어 3분 걸리던 초등학교까지의 등굣길. 95% 이상 사라진 그 동선의 마지막 길을 우연히 발견했다. 아파트 숲과 초등학교 사이, 말 그대로 일부러 가지 않으면 굳이 갈 이유가 없던 그 길을 발견해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그 길을 학교 쪽으로 한 번, 반대편으로 한 번, 그 길을 따라 아직 남은 외곽을 따라 또 한 번 걸었다. 1학년 때부터 6학년까지. 6년이란 시간이 그 길을 따라 떠올랐다.
가구조사하듯 찾아보진 않았지만, 아직 동네에 살고 있는 초등학교 동창은 대략 네댓 명으로 짐작한다. 서먹해진 시간, 작정하면 다시 만나도 좋을 놈들인데 굳이 그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다. 어쩌면 시간이 더 지나고 우연처럼 그 인연이 맞닿으면 그때 건배해도 좋을 것만 같다.
기억 속 박제된 그 시절의 동네를 수술을 핑계 삼아 거닐었다. 떠오르는 더 많은 것들은 봄바람에 실었다. 봄이 지나 다음 계절에 이르면 수술은 끝나 회복하고 있을 것이다. 수술로 더 건강해지는 이들도 있겠으나, 이번 수술은 극심한 고통을 일순간에 제거해 주는 수술이라 두근거리는 마음뿐이다. 내 안의 고통이 사그라들면 그때의 동네 풍경은 이전과 다를지도 모르겠다.
고통이 사라진 만큼, 추억과 여유와 사색을 채워 넣고 싶다. 더 자주 동네를 거닐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