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이란 단어가 사라졌다. 상영관, 멀티플렉스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또는 프랜차이즈 극장의 이름을 직설적으로 말하며 그곳을 의미하기도 한다. 더 이상 젊은 세대는 그곳을 극장이라 말하지 않는다. 하물며 관람코자 하는 영화를 고르고 극장을 찾아가는 시대도 지나버렸다. 현장에 가서 시간대가 맞는 영화를 고르는 일이 다반사다. 그 시절에는 극장에서 영화 한 편 보는 것이 제법 큰일이었다. 물론 지금도 큰일이 돼버렸다. 관람료가 너무 비싸서 말이다.
무서운 영화를 좋아한다. 소복 입은 한국 귀신은 너무 싫지만, 좀비나 뱀파이어 각종 괴물은 대환영이다. 깜짝깜짝 놀라는 스타일보단 잔인하고 고어 풍의 영화를 좋아한다. 도무지 왜 그런 영화를 일부러 찾아보냐고 묻는 아내의 질문엔 마땅한 대답이 없다. 그냥 좋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지간한 고어 영화는 모두 섭렵했고, 가끔 생각나면 다시 찾아보곤 한다. 그 암흑이 겹겹이 씐 영화를 보고 나면 현실이 그토록 아름답게 느껴질 수가 없다. 고마울 따름이다.
영화를 좋아하는 문학평론가의 책은 역시 색달랐다. 솔직히 제목이 '무서운 극장'이라 기대하고 표지를 열었으나, 무서운 영화로 인지하고자 하는 작품이란 저자의 의견에는 동의하나, 그 이야기를 풀어가는 식견 높은 저자의 수준 때문에 이 책이 '무서운 책'이 돼버렸다.
분명 나도 본 영화인데 이렇게 해석의 차이가 있을 수 있구나!를 실감하게 했다. 물론 나는 문학평론가가 아니기 때문에 그 어떤 실망감이나 자괴감이 들진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시선은 부러울 수밖에 없었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와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를 읽고는 무릎을 탁 쳤다. 아주 오래전에 본 것 같은 기억이 선명한 <요리사, 도둑, 그의 아내 그리고 그녀의 정부>는 담긴 속 이야기를 듣고 나니 다시 한번 봐야겠단 다짐이 들었다. <지옥의 묵시록>은 언젠가 컨디션 아주 좋은 날을 기다리고 있다. 얼마 전에 다시 보고 펑펑 울뻔했던 <피아노>는 그야말로 명작이다. 나도 사랑합니다. <로마>의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그리고 <기생충>과 <어스>다. 저자의 말대로 워낙 많은 곳에서 <기생충>에 대한 이야기를 쏟아낸지라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까 싶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작품 속에서 발굴할 수 있는 다른 이야기를 정확하게 핀셋으로 집었다. <어스>에 깃든 숫자의 일련 성과 대립과 관계의 맥락도 몹시 흥미로웠다. 그 흥미는 <기생충>과 <어스>를 두세 번 정독하게 만들었다.
관객에게 1차원적 즐거움을 주는 예술 장르가 영화가 맞다. 하지만, 종종 그 가운데 공포라는 장르의 가면을 쓰고 있는 작품도 있다. 하지만, 관객을 불편하게 하는 그야말로 여러 생각을 떠올리게 하는 영화야말로 정말 재미있고 거듭 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느낀다.
그런 영화들을 알차게 묶어낸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