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가 없다. 신 따위를 믿는다니. 내겐 그저 구차한 변명처럼 들렸다. 고마울 정도는 아니지만 다행히도 신을 믿지 않는 신념이 그 어떤 해를 끼치진 않았다. 그럴 수 있다면 여생 내내 그럴 생각이다.
사람이 죽으면 흔히 별이 된다고 말한다. 종교에 따라 천국에 가기도 하고 환생을 하기도 하지만, 별이 된다는 것만큼 낭만적인 여운은 없다. 감동을 파괴할 맘은 없지만, 사람이 죽어 별이 된다는 건 믿을 수도 없고 그럴만한 근거도 없다. 함께 지낸 누군가가 죽고 사라지는 것을 아쉬워 만든 낭만적인 거짓말 정도가, 맞다.
마당에서 기르던 똥개들은 두 해를 넘기지 못하고 집을 나갔다. 할머니께선 속상한 나를 위로해 주셨지만, 훗날 알고 보니 개 장수에게 돈을 받고 팔았던 것이었다. 그리고 까까머리 중학생 첫해 집 앞에서 교통사고로 죽었던 누렁이 때문에 나는 수업 도중 펑펑 오열을 했다. 이후 비록 똥개라 할지라도 이후 그 어떤 동물도 기르지 않게 되었다. 개 장수에게 받은 돈으로 내게 간식을 사주셨는지, 동네 할머니들과 즐기셨던 민화투 자금으로 쓰셨는지는 모른다. 열아홉 살 봄 할머니는 내가 보는 앞에서 돌아가셨다. 막내 숙부의 고집으로 장례를 집에서 치렀고, 3일 내내 비가 펑펑 내렸다. 40대 중반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렇게 고생했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낮술에 잔뜩 취해서 나만 혼자 있던 집에 도둑처럼 오셔서 눅눅해진 통닭을 건네주고 가셨던 외할아버지께서도 돌아가셨다. 담배와 술이 뒤섞인 꼬릿하지만 정겨웠던 당신의 냄새가 맘먹으면 1초 만에 소환될 정도다.
아침과 저녁 뉴스에 연달아 나오던 흔한 교통사고 뉴스의 주인공이 친척이 되기도 했다. 그래도 1년에 예닐곱 번은 마주했었는데, 삶과 죽음의 경계가 단 1초 만에 결정되어버린 그 사고는 아직도 실감 나지 않는다. 중고등학교를 같이 다닌 그야말로 적당한 거리감의 친구는 무단횡단을 하는 바람에 버스에 치었다. 30대 중반의 그는 결혼 2년 차였다. 너무 속상해 장례식장에서 술만 마셨다. 마라톤이 취미였던 지인은 50살이 되던 해 심장마비로 기약 없이 떠났다. 그가 내게 전한 인간적인 조언과 충고 그리고 진심 어린 대화는 아직도 귀에 선명하다.
30여 년을 병마와 싸우다 생을 마감한 둘째 숙부의 장례는 연로한 아버지 대신 내가 모두 맡았다. 죽음이란 과정이 얼마나 단조로운지, 남은 가족들이 감당해야 할 슬픔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를 여실히 느꼈다. 이승과 저승을 소재로 삼은 애니메이션 <코코>에서 더 이상 이승에서 기억해 주지 않는 이는 저승에서 사라지게 된다는 설정이 장례 내내 나를 뒤흔들었다.
내 곁을 떠난 건 누렁이 똥개 한 마리뿐이었는데, 어느덧 많은 이들과 작별을 했다. 나를 조금 더 바른길로 안내해 준 해철이 형도 의료사고로 생을 달리했고, 수학여행을 가던 학생들, 이태원에서 즐거운 추억을 만들던 사람들 모두 우리와 작별했다.
그야말로 평온한 일상, 그 어떤 심리적 불안감도 없는 차분한 감정이 오래 이어지면 더는 볼 수 없는 이들을 떠올리곤 한다. 어쩌면 삶과 죽음의 경계는 심장이 뛰고 의식이 있고 함께 대화할 수 있는 그런 것들로는 설명 안될, 그 너머의 가치에 있다고 느낀다. 그래서 죽음으로 이제는 더 함께 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억하고 추억할 수 있다면 함께 하고 있는 거라 나는 생각한다.
죽으면 별이 된다는 그 거짓말을, 그래서 나는 믿게 되었다. 공해로 찌든 도시의 밤하늘엔 비록 그 별들을 볼 수 없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우주의 별이 사라진 건 아니니까.
나도 언젠가 별이 되겠지. 아직 정정하신 부모님보다 먼저 별이 되진 않아야겠고, 사랑하는 두 아들보다는 먼저 별이 되어야겠지. 순리를 지키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