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일기] 다정한 거인 ㅣ 남종영 ㅣ 곰출판

by 잭 슈렉

거짓말을 하면 코가 길어지는 사람이 되고 싶어 했던 목각인형 피노키오를 읽으며 가장 두근거렸던 순간은 고래 뱃속에서 피노키오와 할아버지가 만난 순간이었다. 도대체 얼마나 큰 물고기길래 그 속에 사람이 그것도 둘이나 들어갈 수 있단 말인가! 더욱이 숨도 쉴 수 있는 걸 보면 정말 크긴 엄청 큰 물고기가 맞다고 생각했다. 비루했던 시절이었다. 달리 읽을 거라곤 다락방에 오래된 계몽사 동화 전집이 전부였다. 읽고 또 읽었다. 누런 미색의 종이에 활자 인쇄도 조악해서 몇몇 글자는 해독이 불가한 수준이었고, 삽화라곤 연필로 대충 끼적인 정도의 열댓 장을 넘겨야 한 컷 나올까 말까 했던 책들... 그 사이에서 <피노키오>를 읽으며 사람이 되고 싶어 한 피노키오의 꿈과 함께 고래라는 동물에 대해 두근거림을 느끼기 시작했다.


딱 꼬집어 언제부터라고 말하긴 힘들지만 고래가 너무 좋았다. 바다에 살면서 물고기는 아닌, 아가미가 아닌 폐로 숨 쉬는 그 녀석을 늘 동경했다. 덕후 친구 덕에 피규어에 잠시 빠졌고, 집과 사무실 PC 앞엔 20cm 정도의 고래 피규어가 하나씩 있다. 그리고 무려 1년간 용돈을 모아 9개월 예약 구매를 한 대왕 고래의 피규어도 포장 그대로 고이 간직하고 있다. 이건 무려 길이가 70cm다. 단 한 번도 실제로 본 적 없는 존재. 그래서 결국 영화, 사진, 그림, 이야기, 피규어로만 간직할 수밖에 없는 존재. 바로 고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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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 황당한 생각도 한다. 바다 밑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에 아주 커다란 물고기가 있고, 그 물고기에게 맑은 공기를 전해주는 메신저가 고래라고 말이다. 맥락도 없고 근거도 없는 이 상상은 이미지로 고래를 바라볼 때면, 오래 바라볼 때면 유독 더 선명해지고 세밀해진다. 초기 육지에서 살았던 것이 왜 바다로 흘러들어가게 됐는지도 의문이다. 어쩌면 수십수백 년에 걸쳐 진화의 과정에서 바다를 지배한 그 커다란 물고기가 메신저로서 고래를 지명하지 않았나 싶다. 물론,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제목이 참 맘에 들었다. <다정한 거인>이다. 고래도 없고 신비로움도 없다. 따뜻하고 친절한 친구 같은 다정함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래의 상징인 크기를 제법 맛있게 뽑아냈다. "평화를 부르는 고래의 생태 사회사"라는 부제목은 이 책이 단순히 고래에 대한 생물학적인 접근만을 하지 않고 있음을 시사한다. 포경의 역사, 그 시절의 이야기, 여전히 끊이지 않는 고래 포획의 이야기는 고래에게 자연에게 그저 미안할 따름이다. 또한 고래가 지닌 생태계에서의 중요한 역할도 결코 모르지 않을 텐데, 우린 그 많은 기회와 가치 그리고 시간을 남용하고 말았다. 그래서 고래는 지구를 지키는 수호자의 역할에서 인간으로 인해 고통받는 피해자가 되어버렸다.


책은 총 4개의 큰 장으로 고래를 다룬다. 1장은 생물학적인 고래를 이야기한다. 바닷속에 사는 포유류로서의 고래, 이빨과 수염의 구조, 물고기 사냥을 위한 공기방울로 짠 그물, 집단 자살 등 가볍게 다가오면서도 신기한 내용들로 채워진다. 특히 한 번에 많은 양의 먹이를 먹기 위해 공기방울을 만드는 사냥법은 고래만이 할 수 있는 전매특허. 더욱이 고래 스스로 삶을 마감하는 자살행위는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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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인 고래 학살의 시대를 이야기하는 2장에서는 유럽과 일본의 포경에 대해 조명한다. 때로는 포경선에 맞서 싸우기도 하지만, 결국 고래는 인간의 탐욕 앞에 처참하게 삶을 마감하게 된다. 포경과 관광 사이에 놓인 고래의 현실과 돌고래들의 역습을 다룬 3장은 앞으로 우리가 자연을 대상으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고민하게 한다. 동물원이라는 낡은 시스템과 돌고래쇼를 관람하며 박수 쳤던 지난날들에 대한 반성이 절실하다. 기후 변화의 중심에서 주요한 역할을 해온 고래의 기능과 가능성은 4장에서 소개한다. 고래가 똥을 싸지 못하는 이유와 인간의 언어를 흉내 내는 수준의 인격체로서의 고래 등이 짧고 굵게 다뤄진다.


단순히 몸집이 크기 때문이 아니다. 육지에서는 코끼리가 나뭇잎을 먹기 위해 나무를 쓰러뜨리고 나무에 매달린 나뭇잎의 80%만 먹고 자리를 이탈하는 과정에서 다른 많은 동물들의 먹이와 생태계의 선순환이 이뤄진다. 고래 역시 마찬가지다. 고래이기 때문에 가능한 자연의 선순환에서 막대한 크기를 자랑하는 퍼즐이 오늘날 무분별한 욕망에 짓눌려 무참하게 짓밟히고 있다.


언제까지 이 다정한 거인이 우리 곁에 있어줄지는 장담할 수 없다. '더 늦기 전에' 더 큰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인간 역시 자연의 일부임을 되새긴다면, 공존과 상생의 미덕을 모쪼록 펼쳐야 할 것이다.


<책 자세히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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