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일기] 냉장의 세계 ㅣ 니콜라 트윌리 ㅣ 김희봉

냉장의 세계 ㅣ 니콜라 트윌리 ㅣ 김희봉 ㅣ 세종연구원

by 잭 슈렉

브랜드를 막론하고 맥주야말로 차갑게 시원하게 마셔야 제맛이다. 십수 년 전만 하더라도 술집에서 생맥주를 두 번째 시키면 마시던 잔에 따라주었는데 언제부턴가 새로 맥주를 시키면 냉장고 또는 냉동실에서 갓 꺼낸 차가운 새 잔에 맥주를 따라준다. 흡사 그것은 호프집에서 치킨을 시키면 1인당 앞접시 하나에 포크 두 개를 주는 수준의 업그레이드를 뛰어넘는 나름의 혁명이나 다를 바 없다. 마시는 내내 미지근해지지 않는 맥주. 그것은 맥주에 대한 예의이자 맥주를 즐기는 애주가의 기본자세가, 맞다. 가끔 집에서 맥주를 마시면 서너 개의 맥주잔을 냉동실에 넣어놓고 번갈아가며 마실 때가 있다. 장점은 늘 새 컵 느낌이 나서 좋은 건데 단점은 어지간히 귀찮다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술집에 가나 싶다.


차갑지 않은 맥주 상상해 본 적 없다. 미지근한 아이스크림은 차라리 안 먹고 만다. 윤종신이 목놓아 불렀던 열라 좋은 팥빙수, 살얼음이 동동 뜬 물회와 동동주도 떠오른다. 이냉치냉이라 했던가! 냉면도 끼워주자. 맞다. 이 모든 음식은 차갑게 먹는 맛이 있다. 냉장 시스템이 구비되어서야 즐길 수 있게 된 현대 과학문명의 총예가 바로 앞서 나열한 음식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일례로 북한에서 한 겨울에만 냉면을 먹은 이유는 간단하다고 한다. 겨울이나 되어야 얼음이 있으니까! 한여름에 얼음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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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스트 어웨이>에서 무인도에 조난당한 톰 행크스는 수업 시간에 졸지 않은 덕택에 불을 만들어 따뜻한 밤을 보내게 된다. 하지만, 그곳에서 지내는 4년 내내 단 한 번도 얼음을 먹을 수는 없었다. 따라서 그는 섬을 떠나 문명세계로의 탈출을 시도했고 운이 좋아 집으로 돌아온 뒤 가장 먼저 먹고 싶은 것을 '얼음'이라 말했다. 맞다. 인류가 불을 발견한 것은 그토록 오래되었으나, 얼음을 자유자재로 다루게 된 건 200여 년 정도에 이르지 않는다. 그마저도 얼음을 발견하면 녹기 전에 쓰는 소모적인 형태였으나, 이후 냉장 기술이 발전되어오면서 냉동창고, 냉동차량, 냉장고 등으로 이어져 그 어느 때보다 더 자유자재로 음식물과 식재료를 마음껏 다루게 되기에 이르렀다.


책은 '냉장'이란 획기적인 이슈에 관심을 둔 저자 각종 현장에서 체험과 고생 그리고 범람 수준의 자료를 파헤치며 일목요연하게 나열했다. <인류의 식탁, 문화, 건강을 지배해온 차가움의 변천사>라는 부제가 주는 의미는 단순히 냉장이 음식을 차갑게 만들어주는 효과를 뛰어넘어 인류에 끼친 여러 영향을 다각도에서 바라봄을 시사한다. 냉장 음식을 통해 고질적인 병과 전염병을 이겨냈고, 더 다양한 식재료를 통한 영양소를 1년 내내 즐길 수 있게 되었다.


고기는 냉장을 통해 더 풍부한 식감이 생겨났다. 사시사철 각종 과일, 채소를 즐길 수 있음은 축복과도 같다. 하지만 동시에 오랜 시간 냉장을 거친 오렌지에 함유된 비타민이 갓 재배한 오렌지보다 덜 함유된 것은 어쩔 수 없는 대가일 것이다. 갓 수확한 식재료를 더 이상 맛볼 수 없음은 안타깝지만, 그로 인해 햄버거를 먹을 수 있게 된 것 또한 상대적 축복이 맞을 것이다. 빵, 패티, 치즈, 토마토, 양상추, 계란, 피클, 양파 등 햄버거의 기본 재료를 냉장 기술 없이 한 시점에 만들어 먹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책은 그야말로 친숙하고 즐겁게 우리의 일상에 깃든 냉장 효과를 재미있게 들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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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냉장 기술로 인해 불필요한 식재료를 더 많이 구매하게 되고 이로 인해 그전과 다르게 많은 음식물 쓰레기가 만들어지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지구에 존재한 200여 개의 국가 중 냉장고와 냉장 시스템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국가 외에는 여전히 차갑고 시원한 음식을 즐기지 못하는 곳도 있기 마련이다. 냉장은 흡사 부의 상징, 자본주의의 척도가 되어가고 있다. 또한 냉장은 일종의 계급과도 같은 현상을 시사한다. 이는 우리나라로 치면 한 집에 일반 냉장고와 김치냉장고 각 한 개씩 구비되어 있음이 으레 당연한 일처럼 뿌리내리는 것에서 시작한다. 쇼윈도 냉장고가 즐비한 매장, 온도를 잃지 않고 오랫동안 숙성되어 뛰어난 맛을 보이는 고가의 음식이 그러하다.


이 밖에도 책은 냉동차량을 만드는 과정, 냉장고의 탄생과 냉장고가 미국 사회에 깊게 관여하게 된 서사 등을 통해서도 재미있는 요소들을 들려준다. 더욱이 냉장고를 갖추게 되어 잦은 장 보기가 사라지고, 오랫동안 음식물을 보관함으로서 여성들이 주방에서 보내는 시간이 축소되어 사회 활동의 저변에 기여하게 된 것 등 여러 측면에서의 접근이 신선하고 매력적이다. 즉, 냉장 기술은 세탁기와 함께 남녀의 사회적 균형감을 이루는데 큰 기여를 한 셈이다.


400쪽을 훌쩍 넘는 방대한 분량에 과연 '냉장'이란 이슈를 어떻게 담았을까! 첫 장을 넘기기 전부터 흥미진진했다. 그리고 어려우면서도 쉬운, 그리고 우리 일상에 매우 가깝게 존재하는 주제라 그런지 요소 하나하나 허투루 넘어가는 구석도 없었다. 어쩌면 더 이상 냉장 기술 없이는 '먹을 것'에 대한 가치를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냉장은 21세기 우리 일상생활에 절대 없어서는 안 될 존재나 다름없다.


며칠만 버티자. 주말이 오면, 차가운 맥주를 차가운 맥주잔에 거품 3할의 비율로 부어 멈추지 않고 원샷을 하고야 말겠다. 상상만 해도 온몸이 시원해진다. 크흐...


<책 자세히 보기>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21684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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