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나나
“아빠랑 산책하러 갈 사람~”
차가운 물을 가득 채운 텀블러부터 가방에 담는다. 물티슈와 가재 수건, 그리고 손 소독제도 빼놓을 수 없다. 혹시 모르니 줄넘기도 가끔은 슬그머니 챙겨본다. 가방을 준비하는 동안 두 아이는 어디로 갈 것인지 얼른 출발하자고 재촉하는 날이 있는가 하면, 내키지 않는 날엔 서로 눈치만 보기도 한다. 가끔은 먼저 말 꺼내기도 전에 산책하러 가자고 할 때도 있다. 그럴 땐 분명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것이다.
초등학교 4학년과 1학년 두 아들 그리고 우리 부부에게 있어 산책이란 가족의 단합과 화합을 이루는 일종의 놀이와도 같다. 둘레길이나 오솔길과 같은 자연을 벗 삼는 좋은 조건은 없다. 서울 한복판에 상업지구라 해도 부족함이 없을 동네지만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남산과 청계천이 있는 풍경이다.
청계천 쪽으로 두세 코스, 장충단 공원과 남산 방향으로 서너 코스를 만들었다. 짧게는 30여 분, 보통 1시간, 가장 먼 코스는 2시간이 훌쩍 넘는다. 물론 계획한 코스를 도중에 변경하는 때도 있고, 예기치 못한 이유로 산책이 중단되거나 연장되기도 한다.
식구가 모두 함께 할 때는 우왕좌왕 괜히 분주해진다. 수시로 짝을 바꿔가면서 손을 잡기도 하고, 넓은 길이 나오면 넷이 나란히 걸어야 한다고 막내가 고집을 부리기도 한다. 가족 중 체력이 꼴찌인 아내와 단둘이 즐길 때는 거리를 최소화한다. 두 아이와 각각 걸을 때면 그 분위기와 풍경은 닮은 듯 조금은 달라진다.
첫째와는 다양한 주제의 대화가 꽃을 피우고, 기분과 감정에 중점을 둔 분위기가 이어진다. 둘째와는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들에 대한 설명과 녀석의 질문에 대한 대답에 집중하게 된다. 마지막 조합으로 두 아이와 함께 할 때면 묘한 기류가 느껴진다. 내 손을 누가 먼저 잡는지부터 코스를 앞서고자 추월을 반복한다. 장난과 시샘, 그리고 경쟁의 혼란스러운 산책이 된다.
코로나 시대에 아이들의 성장에 맞춰 산책으로 방향성을 잡은 가족 놀이는 만족도가 나날이 높아지고 있다. 다행히 최근에는 실외에서 마스크를 벗어 한결 가볍고 싱그럽다. 공원에서 뜀박질을 즐기고 줄넘기로 땀을 흠뻑 쏟아낸다.
자동차가 주행하는 대로변과 나무들이 우거진 남산 산책로, 그리고 물소리가 생생한 청계천에 오가는 산책은 걸으면 걸을수록 매번 다른 느낌을 선사한다. 통통한 첫째에겐 다이어트의 의미로, 둘째와는 더 많은 대화의 시간으로, 집순이 아내와는 부부 금실을 돈독하게 해주는 효과가 있다.
코로나가 정점에 달했던 작년 여름. 방학이란 핑계로 평소보다 게으름을 부리던 큰 아이와 함께 주말 아침 산책을 시작했다. 하루가 다르게 뱃살이 두드러지던 녀석이라 누구보다 운동이 필요했다. 아빠의 제안에 귀찮아할 법도 했으나, 대뜸 좋다고 흔쾌히 수락해 주었다. 둘째에게도 물었으나 역시나 거절당했다. 너무 일찍 일어날 수 없다고 자기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우겨댔다.
겨울이었다면 깜깜했을 새벽 시간이 한여름에는 낮처럼 환했다. 차이가 있다면 골목과 거리에 사람과 자동차가 거의 없다는 정도였다. 아직 잠에서 덜 깬 부스스한 모습으로 집을 나섰다. 새벽의 공기는 무척 상쾌했다. 남산까지 향하는 지름길로 분주히 걸었다. 자동차로 북적였을 이면도로가 한산했다.
아스팔트 바닥이지만, 모처럼 걷는 맛이 느껴졌다. 남산에 도착한 시각은 새벽 6시. 우리보다 먼저 그곳을 찾은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모습에 무척 신기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늘 찾는 동선을 따라 익숙하게 걸음을 이어 나갔다. 장충단 공원 옆 물길을 가로지르는 징검다리도 건넜고, 아기자기하게 만든 꼬불꼬불 오솔길도 지났다.
지압 돌을 맨발로 걸으며 비명을 참았고, 산책로를 향하는 제법 많은 수의 계단을 짧은 호흡으로 올랐다. 송골송골 이마에 땀이 맺혔다. 가볍게 떠오르던 발걸음이 조금씩 무거워졌다. 나뭇잎이 포물선을 그려 팔을 뻗어 올리면 닿을 정도로 드리워진 본격적인 산책로에 이르렀다. 시원한 물 한 모금 마시니 몸에 맺힌 땀방울이 숲 속으로 사라지는 느낌이 들었다.
우거진 나무 사이로 햇살이 들어와 땅바닥에 모자이크처럼 조각이 되어 흩어졌다. 저만치 무지개가 보이기도 했고, 바람에 나뭇가지가 흔들릴 땐 햇살이 춤을 추며 일렁거렸다. 햇살만 밟다가 지루해지면 그림자만 밟아도 재미가 있었다. 산책로 옆으로 흐르는 좁은 냇물의 물 흐르는 소리와 함께 이른 새벽 바람결에 흔들리는 나뭇가지 소리, 그리고 나와 아이가 함께 걸어가며 나누는 짧은 여러 가지 대화 소리가 교차했다.
힘들면 아무 곳에서나 주저앉아 쉬었고, 조금 쉬고 나면 다시 쌩쌩해진 발걸음으로 산책을 이어갔다. 백번까지는 아녀도 오십 번은 족히 오갔을 산책길인데 그날따라 유독 크게 보인 서울타워의 웅장한 모습에 아이는 매우 놀라는 눈치였다. 선명한 하늘, 고요한 공간, 곡선으로 빼곡한 숲과 길 사이로 드러난 하늘을 향해 뻗은 타워의 곧고 단단한 모습은 유독 더 두드러져 보였다. 서울타워에 시선을 고정하고 천천히 걷는 녀석의 모습에서는 사뭇 진지한 무언가가 느껴졌다.
얼마 전, 밤 산책이 갑자기 가고 싶어 아내는 쉬게 하고 두 아이와 함께 남산을 찾았었다. 서울 타워까지 오르는 길을 따라 천천히 걸으며 중턱에 다다랐을 때였다. 막내 녀석이 갑자기 난간 바깥쪽을 내려다보면서 너무 상기된 목소리로 제자리에서 폴짝폴짝 뛰었다. 남산 아래로 드리워진 도심의 야경을 보면서 건물에서 반짝이는 불빛이 별처럼 보였다. 하늘에 뜨는 별이 산 아래에 있었으니 마냥 신기해했다. 팔을 뻗으면 별에 손이 닿을까 싶어 여러 번 허공을 허우적거리기도 했다.
그때의 기억을 떠올렸을까? 큰아이는 국립극장 너머로 보이는 시내의 경치를 시야에 품고는 햇살이 창문에 반짝거리는 것을 보고는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그때 밤하늘 별빛처럼, 아침에 마주하는 햇살의 느낌이 어떤지 들려주었다. 햇살은 마치 밤하늘에 떠 있는 달처럼 우리를 따라다녔다.
돌아가는 길은 북적거렸다. 하지만, 집만큼은 여전히 한밤중이었다. 곤히 잠든 아내와 둘째 녀석의 표정에는 꿈나라 여행이 얼마나 달콤한지 들려주고 있었다. 아침을 준비하는 분주한 내 곁에서 큰 아이는 주말 아침 산책이 너무 좋다고 고백했다. 다음 주에도 그리고 앞으로도 자주 가자고 먼저 말하는 표정에는 행복한 마음이 느껴졌다.
최근에는 더 다채로운 모양으로 산책을 꾸미고 있다. 아이들의 학교생활과 국어랑 수학 공부도 산책할 때 나눈다. 특히 큰 아이의 성교육도 틈틈이 산책과 함께하고 있다. 또한 산책 말미 코인 노래방으로 향하는 코스는 모두가 가장 좋아하는 이벤트가 되었다. 만화주제가, 동요, 힙합까지 아이들은 신나게 노래를 부르고 집으로 향한다. 산책하면서 흘린 땀이 노래방에서 화산처럼 분출된다. 서로 먼저 씻겠다고 아웅다웅하는 모습도 사랑스럽고 즐거운 일상이다.
위드 코로나에 맞춰 미뤘던 수영을 시작했다. 두 녀석 함께 토요일 아침에 배우는 수영이라 진도는 더디지만, 물을 무척 좋아하는 성격에 배움의 시간이 즐겁고 신나게 흘러가고 있다. 집에서 수영장까지는 느긋하게 걸어서 20여 분 거리. 수영장 다녀오는 길에 산책도 더불어 이어가고, 집으로 오는 길엔 전통시장에 들러 간식도 함께 고르는 재미도 쏠쏠하다.
아무리 반복하고 강조해도 부족함 없을 것이 바로 건강이다. 공부도 건강해야 할 수 있고, 하물며 노는 것도 건강해야 가능한 일이다. 어리기도 하고 코로나로 인해 제약이 많은 일상에 쉽고 간단하게 즐길 수 있는 산책은 더할 나위 없이 가장 좋은 온 가족 운동이 되어 있었다. 어디든 걸을 수 있는 길이 있고, 언제라도 걷고 싶을 땐 운동화만 신으면 될 일이다.
불어오는 바람을 온몸으로 느낀다. 대화를 나눠도 좋다. 침묵도 좋다. 차분하게 걷거나 조금 속도를 내도 좋다. 콧노래를 흥얼거려도 좋다. 차가운 도심 속 인공물과 따뜻한 자연이 만들어내는 곡선의 파도 속에서 걸어 나간다. 걷고 또 걷고, 함께 걷는다.
건강한 일상을 위해, 오늘도 산책을 이어 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