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의 꿈결

바나나

by 잭 슈렉

막연하게 피어오르는 실낱같은 희망이 있었다. 절대 이뤄질 수 없는 꿈이라는 걸 누구보다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가끔은 그런 희망을 품어보는 것만으로도 괜히 기분이 좋아지니까. 두부를 자르듯 선을 긋지 않더라도, 물을 자르는 마음으로 그러했다.


태어나면서부터 갖고 있던 장애라 그리 유별을 부릴 만큼 대단한 일은 아니었다. 조금 불편했고 달랐을 뿐. 그 이상으로 괴리감이나 좌절감은 어디에도 없었다. 다만, 나도 사람인지라 아주 가끔 원인 모를 어두운 기운의 씨앗이 싹을 틔울 때가 있었다. 그 불편한 꽃이 화사하게 햇살 쪽으로 기울 때면 줄기를 싹둑 잘라버렸다.


그리고는 아무 일 없다는 듯 뒷짐을 지고 일상 속에 슬그머니 편입했다. 해맑게 웃기만 해도 모자랐을 유년 시절, 감당할 수밖에 없었던 친구들의 놀림감이 되었을 때 바로 그러했다. 원망은 안 했다. ‘태어나면서부터’라는 거대한 전제가 나로 하여금 ‘차이’와 ‘비교’의 기회마저도 온전히 뺏었기 때문이다.


허나 그 한탄의 대상이 날 숨 쉬게 해 준 부모님을 향하진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몹시 기묘한 일인데, 내가 지닌 장애를 단 한 번도 누군가의 탓이나 스스로의 운이 나쁜 정도로 책망한 적은 없었다. 해탈했다고 하면 경솔한 표현이 맞다. 하지만, 그 모든 불편함과 장애는 그리 민감하게 발현되지 않았다.


단 한순간 불편함이 있었다면 바로 운동할 때였다. 시야가 좁은 한계로 볼 수 없던 쪽으로 향해오는 공 혹은 사람에 대응할 수 없었다. 여지없이 맥은 끊겼고 땀 흘리던 친구들에게 핀잔을 들었다. 그러나 어쩔 수 있는가. 이렇게 생겨먹은 걸. 툭툭 털어버렸다. 속으로는 살짝 기분이 나빴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표현한다 한들 달라지거나 바뀌는 게 없다는 걸 적확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은 비율의 문제다. 가로세로 대각선 곡선 등이 만들어내는 수학적인 비율의 정점에서 아름다움은 드러난다. 얼굴, 몸매, 건축물, 보이진 않아도 연장의 그곳까지 계산한 처마의 파격까지... 그 비율 속에서 아름다움을 느낀다. 100원짜리 동전 크기의 왼쪽 눈 옆으로 500원짜리 동전 크기의 오른쪽 눈이 있었다.


금액은 더 큰데 시력은 전혀 없다. 세상을 반만 보는 반쪽짜리 시야. 좌우 더 넓은 폭으로 고개를 돌렸다. 책을 읽을 때면 의식적으로 고개를 왼쪽으로 30도 정도 틀고 시선은 그만큼 오른쪽으로 꽂혔다. 거울을 바라봤다. 왼쪽 눈을 손바닥으로 가렸다. 오른쪽 눈을 떴으나 보이는 것은 없었다. 말 그대로, 어둠뿐이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을 했다. 아내의 부단한 노력의 결실로 건강한 두 아들을 만났다. 두 번의 임신과 모유 수유 기간을 더하면 50개월 가까운 시간 동안 피로회복제나 탄산음료, 커피 한잔까지 마다한 아내였다. 큰 아이는 10시간의 진통을 함께 하며 가족분만실에서 출산의 순간을 함께했다. 둘째는 태반이 내려앉아 불가피하게 제왕절개로 마주했다. 떠올리기만 해도 온몸에 잔잔한 전율이 흐를 만큼 강렬한 자극과 경이로운 추억을 전해준 가족 탄생의 순간이다.


출산이 임박할수록 거의 매일 밤 나를 괴롭혔던 꿈이 있었다. 그것은 혹여 태어날 아이가 유전적 영향을 받아 시력에 문제가 생기는 꿈이었다. 손가락 발가락 열 개씩 찾을 때가 아니었다. 태어나자마자 두 눈에 시력이 깃들었는지를 살펴야 했다. 하지만, 시력은 출산 순간에 확인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아이가 태어나고도 며칠간 속을 앓았다. 고맙게도 다행스럽게도 두 아이 모두 시력에는 전혀 이상이 없었다. 영·유아 신체검사로 살핀 시력은 또래의 수준이었다.


시간은 몹시 빨리 흘렀다. 바닥을 기어 다닌 아가는 어느새 어린이집 가방을 메고 그날 배우고 놀았던 이야기를 내게 들려주었다. 이제는 4학년과 1학년 초등학생이 되어 매일 저녁 즐거운 놀이와 공부를 함께 이어나간다. 첫째는 아빠의 짝짝이 눈에 대해 가끔 의문을 던졌다. 한쪽 눈으로만 세상을 보는 조건에 대해서 궁금해하면서도 아직은 감정이입을 할 수 없는, 아니 어쩌면 이해하면 안 되는 건강한 녀석이라 더 고맙다.


자식을 둔 부모 누구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눈에 넣을 수는 없어도 넣고 싶을 만큼 예쁜 두 아들을 거의 매일 밤 재웠다. 한 팔에 안아 재우던 갓난아기 시절부터, 퉁명스러운 대답을 남발하는 지금까지... 거의 매일 밤을 아빠라는 자랑스러운 이름으로 두 아이를 재웠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아이들을 재울 때면 ‘오늘 밤에는 어떤 꿈을 꿀까?’라는 질문을 던졌고 꿈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여러 이야기를 나눴다.


거인, 핫도그, 구름, 돌, 피자, 풍선, 잔디, 나비, 뱀, 젤리, 짱구, 만화 속 주인공 등 헤아릴 수 없는 많은 것들이 등장했다. 피노키오랑 같이 고래 뱃속에도 가고, 개구리가 되어 가방 속에 들어가 서로의 학교와 회사에 놀러 갔다. 가끔은 꿈 이야기에 흥미를 잃어 천년 내내 그냥 잠만 자는 꿈을 꾼다고도 했다.


맥락 없던 꿈 이야기가 하루하루 쌓여가자 아이들은 자신의 의견을 서슴없이 표현했고, 이야기와 상상은 언제부턴가 그림과 낙서로 묘사됐다. 결과를 기대하고 심은 씨앗은 아니었다.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아이들의 표현력에 아빠로서 벅찬 행복과 보람을 느꼈다.


꿈이란 것은 어떤 것일까. 세상을 반만 볼 수밖에 없는 내가 온전히 다 보고 싶어 하는 것도 꿈이다. 삼시세끼 밥과 간식을 책임지는 나를 보고 요리사가 되고 싶어 하는 큰아들의 그것도 꿈이다. 아직은 무언가가 되고 싶지 않다며 발뺌하면서도 머릿속에 떠오르는 많은 것들을 대답하는 이제 고작 여덟 살 둘째의 대답도 꿈이다.


그리고 매일 밤 우리가 나누는 이야기도 꿈이다. 하늘을 날아오르는데 굳이 비행기를 타지 않더라도 마음껏 두 팔만 휘저으면 몸이 두둥실 떠오르는 깊은 밤의 꿈도 꿈이 된다.


달콤한 꿈이 된다. 즐거운 꿈이 된다.


그 꿈은 또 다른 꿈을 품고 꾸면서 무럭무럭 자라난다. 실낱같던 희망은 꿈결로 흡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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