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나나
아직 반이나 남은 걸까? 아니면 반도 채 남지 않은 걸까. 두 아이의 아빠. 마흔다섯 살. 꽤 오랫동안 어깨를 무겁게 짓눌렀던 가장이란 이름의 책임감은 근래 들어 한결 가벼워졌다. 기저귀 졸업이 엊그제 같은데 5학년과 2학년 두 녀석의 목욕까지 졸업한 요즘은 매일 저녁이 선물 같다.
달콤한 선물 상자에는 과거와 현재 미래가 공존한다. 그중에서도 종종 해묵은 시절의 일들이 수면 위로 오른다. 그것은 밀물처럼 나를 적시고 이끌어 준다.
그때 나는 춘천으로 향했다. 차가운 철로를 따라 이어진 바로 그곳 춘천으로 가고 있었다. 특별한 이유도 목적도 없었다. 계절에 한 번 혹은 그 이상 그곳에 갔다. 그렇게 인생을 통틀어 세 번 기차에 올랐다.
올곧이 혼자였다. 부모님의 허락을 받지 않고도 온종일 외출해도 될 수 있을 고등학교 시절이었다. 색연필과 노트, CD와 휴대용 플레이어를 가방에 챙겼다. 빠듯한 용돈이라 좌석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청량리로 가는 길에 준비한 빵 두 개가 그날의 유일한 끼니였다.
아무도 모르는 비밀 여행이었다. 굳이 말할 이유도 없었고, 말하고 싶지 않았다. 아침 일찍 오른 기차는 천천히 동쪽으로 향했다. 열차와 열차를 잇는 소란스러운 그곳에 자리를 잡았다. 양옆을 번갈아 가며 바라보면 평범한 풍경도 새롭게 펼쳐졌다.
주기적으로 덜컹거리는 기차의 리듬은 마치 단 한순간도 듣고 보고 느끼는 것들을 쉬지 말라며 내게 속삭이는 것만 같았다. 시야에 가득 채워지는 세상의 모습과 귀를 가득 채우는 음악, 그 틈바구니에서 그림을 그렸고 서투른 글을 썼다.
한적한 역에서 한참을 보냈고, 낯선 춘천 곳곳을 걷고 또 걸었다. 서울 토박이에, 학교를 걸어서 다녔던 내게 춘천은 그리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거리에 놓인 신비로운 도시였다. 다행히도 기차에 몸을 실으면 순식간에 다다를 수 있는 서울과는 전혀 다른 공간이었다. 그렇게 어른이 되는 여정은 늘 기차를 타고 있었다.
가을비가 내리던 그날, 역 폐쇄 소식을 접했다. 묘한 기분이 들었다. 직장과 프리랜서를 거쳐 오래전부터 해보고 싶었던 작은 술집을 운영할 때였다. 한창 성업 중인 가게가 언젠가 사라질 거란 불안한 미래를 당장 마주하는 기분이었다.
매일 오가면서 보는 그리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은 거리의 익숙한 장소들이 하루아침에 사라져 공간이 텅 빈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영원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인생에서 그렇게 익숙함이란 냉정한 습관 속에서 잊히는 것만 같았다. 묘한 기분은 곧 슬픔에 흠뻑 젖고 말았다.
두 발을 내딛던 춘천역의 마지막 날, 다시 그곳으로 향했다. 춘천까지 향하는 길에 철로는 조금도 달라진 것 없이 곧게 뻗어 있었다. 그 위를 달리는 기차. 반복되는 리듬의 철로는 잊었던 과거의 순수함을 다시 불러일으켰다. 노트도 색연필도 CD도 없었지만, 그때 내가 보고 느낀 모든 것들을 잠깐이었지만 어렵지 않게 추억할 수 있었다. 약속된 시간을 향해 도착지를 정한 기차는 무표정하게 달려 나갔다.
날씨가 맑았다면 서운했을까. 비가 제법 왔고, 내 인생의 마지막 역으로 묵묵히 향했다. 막걸리 한 병을 곳곳에 뿌렸고, 마지막 두 모금은 입으로 삼켰다. 묵직하고 알싸한 취기가 혀끝에서 역 전체로 번졌다. 오랜 시간을 버텨온 지친 몇 개의 기둥을 손으로 쓰다듬고 소양강 댐으로 향했다.
낮게 내려앉은 구름과 물 위를 유유히 헤엄치는 빗줄기 사이를 걷고 또 걸었다. 눅눅한 공기와 적막한 분위기는 딱 내 마음과 같았다. 분주하게 가게로 돌아왔다. 비가 오는 날이라 손님은 평소보다 덜했다. 일찌감치 간판 불을 내렸다. 어둑해진 가게에서 소주를 삼켰다. 살아있는 모든 존재가 언젠가 사라질지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감도 함께 삼켰다.
세 번째는 동행이 있었다. 이제 막 4학년이 된 큰아이와 함께 기차에 올랐다. 오랫동안 참았던 그 순간을 조금 서둘러 맞이했다. 둘째는 너무 어렸고, 큰 놈이라면 함께 춘천에 가도 좋을 것 같았다. 여전히 기차는 덜컹거렸다.
그 일정한 간격의 덜컹거림은 아이가 어릴 적 외갓집에 가느라 기차를 탈 때마다 내게 자주 묻던 부분이기도 했다. 우린 그 반복되는 리듬에 맞춰 동요도 불렀고 만화 속 주인공들의 주문도 외웠다. 의식했던 그 간격의 틈바구니에 일상의 지루한 피곤함이 깃들었다. 차마 의식조차 하지 못했던 그 미약한 두근거림은 나를 가득 채웠다.
답답한 교복을 벗고 기차를 탔던 그때로부터 3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로봇으로 당장 변신해도 어색하지 않을 멋진 디자인의 기차와 곳곳의 역, 그리고 끊임없이 펼쳐진 세상 풍경까지 모든 것은 새로워졌다. 달라진 모든 것들이 반드시 좋아진 것은 아니지만, 세상은 그렇게 변화를 이어갔다.
그 속에서 절대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나란히 평행을 이루며 끝없이 이어진 철로가 아닐까. 몹시 빠른 속도로 스쳐 가는 풍경에 한참을 넋을 잃고 바라보는 아이의 눈빛은 반짝거렸다. 빛보다 빠른 속도로 나는 두 번의 과거로 거스를 수 있었다. 적당한 산책과 풍족한 식사가 여행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이곳뿐 아니라, 전국의 거의 모든 곳을 기차를 타고 갈 수 있다고 설명해 주며 스마트폰 화면 속 복잡한 노선도를 자랑삼아 보여줬다. 거미줄처럼 얽힌 철로가 놓인 길에 나를 포함해서 많은 사람의 추억과 인생, 그리고 이야기가 깃들어 있음을 들려줬다. 무엇보다 앞으로 네 삶에서도 기차와 향하는 목적지가 얼마나 다채롭게 다가올지도 감히 이어갔다. 아이는 기대감보단 막연한 느낌의 상상력을 표정으로 대답해 주었다.
정해진 시간, 목적지로 향하는 기차는 그리 머지않은 미래 어디선가 나를 기다린다. 냇물이 흐르는 소리, 바람에 나뭇가지가 일렁이는 소리와는 다른 규칙적인 패턴은 일상과 현실에 스며들어 더 큰 상상을 만들어 갈 것이다.
나는 준비할 것이다. 그리고 약속된 시간으로 걸어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