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중반 술장사를 즐겁게 매듭짓고 몇년이 흘렀다. 그 사이 결혼을 했고, 적극적으로 아내를 설득한 끝에 신혼 2년 차 다시 한 번 술장사를 하게 됐다. 종로 죽돌이 답게 보신각 근처 후미진 2층이었다. 병맥주와 위스키만을 준비했다. 음향시설에 제법 큰 돈도 들였다.
음악을 좋아하는 애호가라면 누구나 한 번 쯤 꿈꾸는 것이 바로 그런 술집일 것이다. 좋아하는 음악을 실컷 들으면서 술을 마시는 공간 말이다. 운이 좋았다고 밖에 말할 수 없지만, 약간의 무리를 감행하면서 나는 서른 한살에 가게를 다시 마련하게 됐다. 벽이고 천장이고 온통 새카맣게 칠해버렸다. 양 끝에 내 몸보다 큰 스피커를 가져다 놓았다. 벽에는 영화 스틸컷과 뮤지션의 사진을 액자에 담아 빼곡하게 채웠다. 갖고 있는 앨범이 그리 많지 않아 스트리밍 사이트 월 정기권도 끊었다. 모든 준비가 끝났다.
홀몸이던 소주장사 시절에 비하면 멀쩡한 직장 때려치우고 아내까지 둔 입장에서 시작한 두번재 술장사는 솔직히 부담이 컸다. 손님이 아주 많이 올 수 있는 컨셉의 가게도 아니었고, 하물며 종각의 고객 유입율은 당시만 해도 큰 폭으로 떨어지고 있었을 때였다. 시장조사 따위 진작 포기한지라 말 그대로 '하고 싶었던 걸 하는 마음'으로 시작했다. 철썩같이 나를 믿었던 아내는 훗날 일찌감치 남편 소원 한 번 들어준 걸로 자기 위안을 했다.
듣지만 보는 것 같은 느낌을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어두운 극장처럼 꾸몄고, 보일듯 말듯 얕은 조명 너머로 액자들을 숨겼다. 그런 연유로 지은 가게 이름은 '라디오 시어터' 이번엔 간판도 달았다. 장사는 생각만큼 잘되지 않았다. 기대한 것은 없었기에 마음이 쉽게 흔들리진 않았으나 아내에게 미안했다. 어쩌면 가게 문을 열고 닫던 1년 조금 넘는 시간 내내 아내에게 미안했다. 이제와서 생각해보면 그나마 가게 정리하는 시간을 오래 허락해준 건물주에게 고마워 해야 하나? 집기들을 땡처리 하지 않고 중고로 알뜰하게 정리했으니 말이다.
이래서 역시 홀몸이 편하다. 즐거운 장사 얘길 준비했으나 시작도 전에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샛길로 빠져들었으니 말이다. 오랜시간이 흘러 이제와선 '아 이런 사람도 있구나!' 했댄다. 모든 것이 아내 맘엔 들지 않았는데 해보겠다고 하니 그러려니 했다더라. 고맙고 미안할 따름이다.
소주 장사 할 때 문지방 닳도록 드나든 지인들은 그 사이 왕래가 뜸해져 그때만큼 자주 찾아오진 못했다. 어묵탕이 없다고 계란말이가 없다고 라면도 없다고 징징 짜던 동기 년놈들 몇몇만이 날 위로했다. 신청곡 다 틀어줘서 고맙다고 계산하며 울던 처자도 있었고, 왜 자기 음악만 안틀어주냐고 시비걸던 아저씨도 있었다. 지금까지 내가 본 가장 큰 캐리어를 들고 와서는 가게에 두고 그냥 나간 손님. 옆 건물과 비슷한 구조라 대뜸 가게로 와선 자기네 일행 없다고 주방까지 한숨에 달려들어가 깽판을 치던 손님. 화장실에서 자던 손님. 모텔인줄 착각한 손님. 일요일 마다 와선 딱 1시간 바에 앉아 혼자 술마시고 홀연히 사라지던 손님. 종로가 아닌 역삼동에 이대로 장사하라고 2시간 내내 날 설득하던 손님도 있었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두 팀 중 하나는 내 또래 혹은 나보다 조금 어린 두 처자였다. 일주일에 한번은 꼭, 많으면 두번에서 세번까지도 왔었다. 직장 동료였던 것으로 보였고, 병맥주를 서로 두병씩, 그리고 신청곡은 두세곡씩 일정했다. 폐업 결정 후 그날이 마지막일 것 같아 서비스 안주를 드리며 작별을 고했건만, 계산하면서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꽤 오랫동안 펑펑 울었었다. 달리 해줄 말은 없었다. 미안하다고 죄송하다고 여러차례 목례만 반복했다.
다른 한 팀은 내 위로 열살은 더 드신 두 형님. 일주일에 서너번, 올떄마다 자정을 훌쩍 넘길때까지 술을 마셨다. 가끔씩은 셔터를 닫고 외부에서 아침까지 술자리를 이어갔다. 관련된 썰이 너무 많아 그 이야기는 다음에 따로 꼭지를 만들어보겠다.
세상 일이란게 계획한대로 뜻한대로 되면 얼마나 좋을까. 말도 안되는 핑계로 날 들뜨게 하더니 하루아침에 가게에서 내쫓은 건물주는 과연 악인이었을까. 급격히 악화된 건강과 흐트러진 컨디션 때문에 장사하는 내내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은 10년이 훌쩍 지난 시점에 뱉어내는 소심한 고백이다. 그만큼 힘들고 어려운게 장사다. 홀에 46석. 바에 6석. 알바 없이 홀로 52석을 일당백으로 떼우며 지낸 시간은 육체적 고통과 함께 소중한 추억으로 남게 됐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난 어느 밤,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가게에 왔던 손님이었다. 유학을 다녀왔고 옛날 생각에 종로에 왔는데 가게가 안보여 전화한 것이었다. 미안하다고 죄송하다고 인사만 반복했다.
20대 중반과 30대 초반에 한 번 씩. 그리고 40대 중반에 이르자 한 번 더 하고픈 욕심이 가끔씩 치민다. 말도 안되는 소리라 개 꿈 꾸듯 말지만, 제법 정교하게 머릿속으로 스케치까지만 해본다. 더는 하고 싶은 일 보단 해야 할 일을 해야 하는 나이가 되버렸다. 슬픈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