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즐거운, 허나 결과물은 졸필인 글쓰기를 할때마다 워밍업에 필요한 시간이 점점 늘어난다. 나이를 먹고 있다는 정확한 변명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그 나이를 거슬러 오를 수 있는 비법을 발견했다.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가는 수준만큼 그 비법은 내게 정확하게 통했다. 그것은 다름아닌 플레이어에 채수영 1집을 올리는 것이다. 클럽에서 무수히 많이 들었던 그의 라이브가 스피커를 통해 내가 머문 공간을 채운다. 동시에 나는 갓 20대와 30대 그 시절로 돌아간다.
팔을 뻗으면 큰형님 기타가 닿을텐데. 1부 끝나고 2부 준비하는 사이 우리 테이블에 와선 얼른 건배나누던 모습. 공연 다 끝나면 그제서야 긴장 내려놓고 함께 술마시던 시간이 다시 펼쳐진다. 그 음악속엔 그때의 내가 살아 있다. 채수영의 음악을 빌어 나는 잠깐이나마 과거의 나를 만나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를 처음 만난 날은 그가 이태원에서 운영하던 클럽 '저스트 블루스'의 마지막 공연 날이었다. 아주 가끔 바람결에 블루스 기타리스트의 이름 석자를 들었으나 주의깊게 듣지 않은 장르였다. 막역한 사이의 띠동갑 K는 오랫동안 그의 골수 팬이었고, 고맙게도 이태원 클럽의 마지막 공연을 내게도 선물했다.
강렬한 번개처럼 뇌리를 스친 그날의 공연은 묵은 추억의 한 페이지 쯤 장식되면서 차분하게 기억 너머로 가라앉았다. 그로부터 몇년이 더 흘렀다. 흥분을 감출 수 없는 목소리로 K는 나를 압구정동으로 불렀다. 몇번의 시행착오 끝에 서울에 다시 블루스 클럽을 오픈한 것이다. 설레는 맘으로 향한 발걸음은 이후 몇년간 꾸준히 나를 블루스의 세계로 이끌었다.
인연이란 참으로 놀랍고 신기하다. 거장이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기타리스트는 내게도 K가 그를 부르듯 '큰형님'이 되었다. 함께 클럽을 운영하는 '작은형님'과도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온 몸으로 블르수를 만끽했다. 그의 연주는 날 것 그대로였다. 살아 숨쉬는 음악. 그는 무대에서 비로소 살아 있었다.
계절이 몇번 더 바뀌면서 그에게 받기만 하는 일이 속상해 작은 거라도 돕고 싶었다. 때마침 클럽의 간판을 새로 만들고 싶어했기에 배운게 도둑질이라고 냉큼 예쁜 디자인을 건네주었다. 신문사 기자인 지인을 통해 적잖은 지면을 통해 다시 한 번 그를 조명하기도 했다. 얼굴을 마주하고 가수와 관객이 아닌 사람과 사람으로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졌다.
나만 보면 약간 의구심 섞인 웃음을 지으며 허탈한 농담을 던졌다. 온 몸에서 퍼지는 진한 술 냄새와 허스키한 목소리는 그만이 지닌 매력이었다. 단 한 번도 나를 한참 어린 녀석 취급하지 않은 그의 품성은 지금까지도 매 순간 또렷이 기억날 만큼 선명하다. 그러던 중 2집에 대한 이야기를 간간이 내게 전했다. 오래전 현업에 종사했었고 그땐 다른 일을 했었지만, 어금니 꽉 깨물고 준비 하자면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었기에 늘 경청했다. 하지만 2집은 내내 더디기만 했다. 물론 본인의 결단이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겠지만, 내가 조금 더 적극적으로 도왔다면 충분히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 있었을 시간이었다. 돌이켜보면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그해 봄에는 많은 학생을 품은 배가 차가운 바닷속으로 가라앉았다. 가을에는 해철이형이 의료사고로 생을 마감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큰형님도 다시는 볼 수 없는 곳으로 먼 여행을 떠났다. 그에게 블루스는 숨쉴때 필요한 공기였다. 블루스는 그의 밥이었고, 블루스를 사이에 두고 우리는 그와 친구가 될 수 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의 1집을 듣고 있다.
미안하게도 그가 여행을 떠난 뒤 그의 음악을 더 많이 듣게 되버린 셈이다.
그 미안함과 그에게 받은 고마움들이 음악속에 파묻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