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길 거리 넘쳐나는 서울이나 대도시는 다를지 몰라도, 작은 도시나 시골에서는 초등학교가 갖고 있는 의미는 생각보다 훨씬 크다. 연중 가장 큰 행사는 학교 운동회가 분명했고, 마을의 구성원 대부분은 같은 학교 출신이 분명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점차 도시로 향했다. 북적이던 학교는 분교가 되거나 폐교가 되었다. 시들어진 마을에 작은 활력이나마 불어 넣어주고 싶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곳에서 공연을 준비했다.
산길을 따라 굽이굽이 들어가면 학생 수 삼사십 명 남짓의 작은 분교가 나타난다. 간이 무대를 세우고 짧은 리허설을 마치면 해 질 무렵 그곳에선 공연이 펼쳐진다. 포크 가수, 동요 합창단, 마술쇼, 팬터마임까지... 깊은 밤이 될 때까지 학교를 찾아준 이들은 활짝 웃으며 박수를 쳤다. 이 얼마 만의 큰 잔치인가. 선생님들도 멋들어진 노래를 뽐냈고, 단 한 번의 공연이지만 그 소중한 인연은 헤어질 때 더 절박했다. 그렇게 봄밤을 네댓 번... 여름밤은 잠시 쉬고 가을밤을 또 네댓 번...
우리나라는 그런 면에서 참 좁다. 5년 넘게 공연을 이어가던 연주자의 지인이 폐교 투어의 공연 기획자였었다. 술자리에서 인사를 나눴고 늘 그랬듯 언제 어디라도 당장 출격 가능한 백수 신세였던 나는 그해 공연팀에 합류했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 할 줄 아는 모든 것들을 쏟아부었다. 무엇보다 답답한 서울이 아닌 전국 방방곡곡 떠돌며 공연을 이어가는 일정이 내게 가장 큰 흥분을 전해주었다. 넉넉하지 않은 예산이라 온갖 잡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흘린 땀은 언제나 달콤했다. 인간이란 존재의 고향이 자연이란 것을 그해 나는 아낌없이 느낄 수 있었다.
완전히 폐교된 공간에서도 무대를 올렸고, 작은 규모의 분교에서도 무대를 올렸다. 고정 레퍼토리와 함께 현지 아이들이 준비한 동요도 무대에 함께 올렸다. 의미가 중요한 공연이었기에 조명 음향 무대팀의 십시일반 품앗이도 훌륭한 합을 보여주었다. 우린 마치 그날 그 장소에서 함께 일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들 같았다.
긴 일정 가운데 또렷하게 각인된 장면이 하나 있다. 어르신들의 영정사진을 촬영해 드렸고, 그분들의 멋쩍은 웃음이 바로 그것이다. 태어난 모든 것들은 결국 죽게 마련인데, 임박한 그 순간에 잠시 잠깐 내 몸이 연결고리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거울처럼 내 얼굴에도 멋쩍은 표정이 깃들었다. 스스로의 영정 사진을 촬영할 수밖에 없었던 <8월의 크리스마스>의 정원도 그랬던 것 같았다.
양평시에 진입하고도 한시간을 족히 들어간 깊은 산속에서 만난 분교 선생님도 기억이 난다. 키가 작고 다부진 체격의 그는 학생들에게 너무 좋은 시간이 될것 같다며 나보다 더 설레는 표정을 보여주었다. 공연 후 뒷풀이 자리에서 그는 수줍게 노래를 한 곡 불렀다. 창작동요 느낌의 그 곡은 청량감이 잔뜩 느껴지는 그의 목소리에 실려 모닥불과 밤공기를 마음껏 지휘했다. 이후 며칠간 흥얼거리며 노래 가사를 남기고자 했으나 까맣게 잊고 말았다. 그 노래가 어떤 노래인지 알 수 있는 방법은 안타깝게도 전혀 없게 되었다.
그해 공연 기록을 사진집으로 남겼다. 그리 두껍지는 않지만 공연 전체의 스케치가 그 안에 담겨 있다. 가끔 책장에서 꺼내 보면 그때 당시의 공기와 바람, 그곳에서 보낸 시간들이 밀물처럼 내게 다가온다. 사람과 음악, 그리고 정이 공존했던 그 순간은 좀처럼 썰물이 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봄이 되면 떠오르는 소중한 추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