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1학년 여름으로 기억한다. 명동의 어느 레코드 매장에서 메탈리카 5집 블랙 앨범을 처음 마주했을 때였다. 있는 듯 없는 듯 앨범 구석에 뱀 한마리가 눈에 띄었다. 이름은 진작 들어봤다. 어느 앨범이든 한 장 사려고 외출한 길이었기에 머뭇거림없이 손에 쥐었다. 서둘러 집으로 돌아와 오디오에 CD를 넣었다. 그날부터 시작됐다. 블랙을 꿈꾸던 시절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지금과 달리 관련 정보를 얻을 유일한 경로는 오직 잡지 뿐이었다. 하지만 매달 한권씩 만들어지는 잡지를 구매하는 것은 내게 벅찬 일. 과월호만 그것도 헌책방에 서서 훔쳐보듯 읽는게 전부였던 시절이었다. 있는 듯 없는 용돈을 아끼고 아껴야 한달에 한장 만원 남짓하는 CD를 살 수 있었다. 그렇게 사고나면 그 다음달까지 한달을 내리 한장의 CD만 듣는게 일과였다.
5집 블랙 앨범은 악몽과도 같았다. 도무지 잠들 수가 없었다. 처음부터 마지막 트랙까지 모든 트랙이 나를 압도했다.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하루종일 특정 구간의 멜로디와 리듬을 허밍으로 반복했다. 어둠속에서 언제 내게 습격할지 모르는 뱀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늘 약간의 긴장감을 마음에 담아두었는지도 모른다.
그 이전에 들었던 음악과는 확연히 달랐다. 묵직했으나 속도감이 있었고, 그러면서 동시에 안정감이 느껴졌다. 장르의 확장이란 면에서 손꼽히는 굴곡점 중 하나였다. 더불어 앨범을 연주 파트별로 나눠듣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다. 연주라곤 꼴랑 흉내만 낼줄 알았지만 애써 노력했다. 물론 매끄럽게 들리진 않았지만 그렇게 들으려고 의식하고 귀를 쫑긋 세웠다. 요란스러웠는데도 집중하면 악기들이 하나씩 하나씩 분리가 되었다. 파트별로 나눠듣는 취미는 이후 드림시어터 앨범에서 궁극에 달했다.
5집을 시작으로 4집, 3집, 2집, 1집의 역순으로 매달 앨범을 구매했다. 4집에서 잠깐 아쉬움이 느껴졌으나, 뒤이은 3집과 2집에서 아드레날린은 화산처럼 폭발했다. 즈음하여 신해철이 언급한 3집에 대한 이야기도 떠올랐다. 도저히 당시엔 구현할 수 없는 사운드였다는 멘트였다. 해철이형의 언급도 있었으니 더 열심히 들었다. 앨범의 주제와 같이 나 또한 메탈리카의 꼭두각시가 된 것만 같았다. 발악에 가까운 행복한 시절이었다. 물론 2집을 듣는 내내 나는 전기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깟 감전 쯤이야. 죽이지만 말아다오!
스무살이 되어 그들의 첫 내한공연을 눈앞에서 즐겼다. 무대에 오른 그들을 보는데 눈물이 절로 흘렀다. 그곳에 있던 모든 이들이 느낀 같은 감정이었을 것이다. 스타일이 확 바뀐 6집 이후 S&M을 지나 지금까지도 여전히 메탈 장르로는 내게 언제나 군림하고 있다. 이후 그들의 내한공연은 이유불문 함께했다.
의리라는게 있다. 음악에도 영화에도 그 의리를 지키는게 애호가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 생각한다. CD장에 가지런히 놓인 한뼘 남짓한 앨범이 그들에 대한 내 의리를 설명한다. 죽을때까지 그 의리를 지켜나가고 싶다. 생생했던 설렘과 두근거리며 잠들지 못한 숱한 밤을 떠올리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