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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의 사진

by 잭 슈렉

엄마의 반강제적 권유로 인해 곗돈을 부었다. 꼬박 2년을 부었더니 말 그대로 곗돈을 타게 됐다. 내 인생 최초의 목돈, 그것은 은행에 저축한 돈과는 또 다른 맛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내심 장만하고 싶었는데 때마침 잘됐다. 본격적인 유행이 일어나기 바로 직전 300D 모델의 DSLR을 손에 쥐었다.


작동법도 익혀야 했고 공부도 필요했다. 똑딱이 디지털 카메라와는 하늘과 땅 만큼의 차이를 보이는 기기였다. 그리고는 거침없이 찍어댔다. 필름이 없으니 셔터에 대한 압박감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렇게 비싼걸 무슨 정신에 샀냐고 타박하셨던 엄마도 벚꽃 배경으로 찍어드리면 연신 좋아하셨다. 출사란 것도 경험했다. 클로즈업은 내가 부담스러워 먼 발치 누군가를 몰래 훔쳤다.


겨울의 끝자락 석모도였다. 부담스러움을 느꼈던 소심함이 낮술 몇잔에 대범해졌다. 나도 모르게 클로즈업을 감행했다. 좌판을 깔고 나물을 파는 전통시장의 할머니였다. 셔터소리와 함께 할머니는 내게 화를 내셨다. 목적도 이유도 하물며 예의도 지키지 않고 촬영하는 결례에 분노하셨다. 몇번을 사과드렸다. 촬영한 사진은 그자리에서 지웠다. 그날 이후 모르는 누군가를 향해 셔터를 누르는 일을 그만두었다.


산동네 중턱에 있던 우리집. 창문 밖으로 펼쳐졌던 노을이 인상적이었다. 카메라를 들고 몇번 찍어보니 담을 맛이 났다. 냉큼 옥상으로 올라갔다. 방에서 바라본 풍경과는 비교 할 수 없을 정도의 넓은 하늘이 펼쳐졌다. 그날이 시작이었다. 가방에 늘 카메라를 갖고 다녔지만, 눈높이가 아닌 하늘을 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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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은 그런 면에서 매력적인 피사체가 아닐 수 없다. 언제라도 올려다보면 하늘에 구름이 있었다. 비슷한 느낌의 모양이 있긴 하나 결코 같은 그림을 보여주지 않는다. 저작권 걱정도 필요 없다. 내 위치에 따라 펼쳐지는 구성도 달라진다. 그래서 그때 나는 묻고 따지지도 않고 아파트와 빌딩 옥상에 그렇게 자주 올라갔다. 이른 아침과 한 낮, 그리고 노을이 질때의 구름이 달랐다. 그야말로 끝없는 풍광을 내게 펼쳐주는 친구였다. 잔뜩 흐린 날, 그리고 구름 한 점 없는 그런 날을 빼고는 이쁘든 평범하든 사진 귀퉁이에 전깃줄이 있든 말든 구름을 찍을 수 있었다.


어떤 결과를 얻자고 시작한 일도 아니었다. 어디 자랑할 만한 곳도 없었다. 하물며 자랑할 수준도 더더욱 아니었다. 그렇게 꼬박 몇년을 구름을 담는 취미를 이어가자 아주 작은 기념할만한 일이 생겼다. 1회 종로영화제의 관계자를 알고 있던 지인이 영화제 포스터에 쓰겠다고 내 구름 사진을 요청한 것이다. 돈을 받고 팔 마음도 없었기에 흔쾌히 고르고 골라 예쁜 것들로만 추려 보내주었다. 사진 값으로 얻어먹은 회덮밥 한그릇의 맛은 지금도 기억속에 남아있다.


이후 구름 만큼 나를 사로잡은 대상은 아쉽게도 없었다. 아내와 두 아이가 그 자리를 대신했으나 이제는 입학식 운동회 졸업식과 같은 기념일에만 무거워진 카메라를 쥐게 된다. 편리한 스마트폰이 있어 다행이다 싶으나, 편리한 것이 결코 좋은 것은 아니라는 나름의 해석은 사진에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300D 이후 두번째 DSLR로 장만한 오두막에도 구름만큼 자주 담아낼 무언가를 어서 빨리 찾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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