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발해서 더 놀라운 의학의 역사 l 리처드 홀링엄 l 서정아 l 지식서가
대학병원 흉부외과를 배경으로 하는 <하얀거탑>은 몇 안 되는 인생 드라마 중 한편이다. 욕망으로 가득 찬 주인공과 그와는 상반된 성격을 보이는 친구를 통해 드라마는 성공과 실패, 그리고 야망과 배려를 들려주었다. 다소 마법에 가까울 정도로 허무맹랑하게 보였던 - 의학 상식이 없으니 내 눈엔 그럴 수밖에 - 수술 장면도 잊히지 않는다. 십수 년 전 성형외과 병원을 배경으로 하는 미드 <닙 턱>에 환장했던 것도 자연스레 떠올랐다.
수술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외과 분야는 말 그대로 사람의 생사를 결정짓는 중요한 행위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의료기술이 발달하지 못한 과거에는 무수히 많은 실험과 환자들의 생명을 담보로 삼았다. 그들의 희생이 없었더라면 오늘날 의료기술도 이와 같이 화려하게 빛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번 책에서 등장하는 여러 사례들은 그야말로 놀라움을 감출 수 없을 정도로 사실적이었다. 잔인한 장면이 순식간에 지나가는 영화와는 달리 환자의 고통과 수술 과정의 자세한 묘사가 활자가 되어 읽어나갈 때의 긴장감은 어지간한 영화 못지않았다.
책은 크게 다섯 개의 챕터로 이야기를 전한다. 피비린내 나는 그 시절 이야기를 시작으로 이식수술, 심장수술, 성형수술, 뇌 수술 등의 분야로 막무가내로 치닫는다. 불과 200년 전만 해도 의사들은 인체의 구성을 잘 알지 못했다고 한다. 사형수의 사체를 훔쳐(!) 골격을 연구했고, 위생적인 관념이 일절 없던 시절이라 수술실 바로 옆 영안실에서 막 시체 부검을 끝낸 의사가 손을 씻지도 않고 그대로 수술실로 이동해 집도한 이야기도 이어진다.
더욱이 당시 수많은 환자들이 수술을 받았음에도 죽음에 이르렀던 이유가 수술을 펼치는 의사들이 손을 깨끗이 씻지 않아서라는 일화도 들려준다. 손만 씻었더라도 그 아주 작은 위생만 챙겼어도 살릴 수 있었던 무수히 많은 생명들로 인해 오늘날의 발전에 이르렀음이 맞다.
우리나라의 의료보험과 의료시스템은 세계에서도 손꼽을 수 있는 수준이다. 어지간한 병은 금방 낫고 고난도의 수술도 성공률이 높다. 약 처방도 쉽게 받을 수 있고 그야말로 의료 천국이 아닐 수 없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의학의 발달과 의사 그리고 그 시대를 살아간 이들의 노력과 희생정신에 대한 일종의 역사기록으로 해석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재미를 위해서라기보단 여전히 시행되고 있는 수술들의 과거를 훑어볼 수 있는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아쉽다면 동양 의료는 철저하게 배제된 서양 의료에 국한된 것이다. 이로 인해 동양의학에 대한 역사 공부가 또 다른 숙제로 만들어진다.
책 맨 끝에는 간략한 연대기가 구성되어 있다. 대부분이 획기적인 사안들이지만 그중 가장 눈에 띄는 세 가지 기록을 옮겨본다. 의료 행위 최초의 기록과 성형수술의 단군할아버지 이야기. 그리고 눈 감자마자 뜨게 만드는 마취제의 개발까지. AI가 체내 암세포를 찾아낼 확률이 100%에 육박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연대기의 가장 최근엔 어떤 혁명적인 기록이 이어질지 궁금해진다.
기원전 10000년 천두술이 널리 시행
기원전 1500년 성형수술(코 재건술)이 최초로 기록
1847년 클로로포름 마취제 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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