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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근거렸다. 이름도 어려워 궁금할 때마다 검색해서 찾았던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신작 소식을 들었다. 이번엔 또 어떤 어처구니없는 설정으로 즐겁게 해줄까 기대가 정말 컸다. 그리고 마주했다. <가여운 것들> 예고편만 봐도 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 방향성 잃은 내 직감은 영화의 엔딩까지 뻗어나갔다. 하지만 정작 관람을 시작하자 도통 불편하고 어딘가 어색한 기분이 나를 괴롭혔다. 그래 맞아. 이래야 맞지. 무리도 아니었다. 그의 전작을 떠올리면 말이다. 결국 그는 감독으로서 이룰 수 있는 모든 성취를 바로 이 작품 <가여운 것들>에 작정하고 담은 것으로 사료된다.
데뷔작 <송곳니>는 데뷔 작품답게 파격적인 시도가 독보적이었다. 조금 난해한 것을 뛰어넘어 대륙을 뛰어넘은 우리와는 전혀 다른 삶의 방식이 주는 이질감은 아주 약간의 역겨움마저 동반했다. 그의 작품 중 가장 먼저 접했던 작품이 <여왕의 여자>였는데 이질감을 느낄 때마다 <여왕의 여자>를 떠올리며 간신히 버텼다.
두 번째 작품 <알프스>는 그 어떤 방법을 동원해도 도저히 관람할 방법이 없었다. 이럴 땐 서둘러 넘어가는 것이 좋다.
세 번째 작품 <더 랍스터>는 메이저에서 만들 수 있는 몹시 마이너 성향의 설정들이 돋보인다. 익숙한 배우들이 출연해서 파격적이지 않을까 하는 안도감은 지나친 우려였다. 랍스터라는 생물이 의미하는 미지의 영역은 '사랑'과 '삶'이라는 두 코드를 드라마틱 하게 엮어 나갔다. 감독으로서 하고자 하는 목적성이 제목과 영화 전체를 통해 가장 잘 드러난 작품이라 생각이 든다. 내내 무채색으로 건조한 화면과 이야기는 보는 이로 하여금 많은 상상과 자극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드디어 네 번째 작품 <킬링 디어>에 이르게 된다. 온갖 철학적인 사유와 종교적이고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많은 것들을 가져다 붙인 해석들이 난무하는 작품이다. 드라마인가? 호러인가? 범죄 스릴러의 분위기도 통속적인 신파의 그것도 담긴 작품은 <더 랍스터>의 수준을 뛰어넘는 괄목할 만한 완성도를 보인다. 감독의 작품을 통틀어 단 하나의 작품을 꼽으라면 이유 없이 본 작품일 정도로 그 만듦새가 절정에 위치해있다. 관계와 이해, 사회적인 인지 성과 개인의 일탈, 그리고 목적성을 위한 수단과 과정에서 더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한다. 피곤할 정도로 그것은 반복적이고 긴밀하게 이어진다.
<가여운 것들> 직전의 <여왕의 여자>는 뜬금없는 시대극으로 펼쳐진다. 흔히 정치라면 남자의 세계로 설명되나 이번엔 다르다. 감독은 여지없이 여자의 이야기로 정치를 해석한다. 졸속적이고 치졸한 감정인 질투와 연민 그리고 동정을 끌어다가 마구잡이로 난도질한다. 그 안에 서사는 탄탄하고 캐릭터들의 감정 변화는 그 어디에도 흠잡을 곳이 없다. <더 랍스터>의 파격과 <킬링 디어>의 불편함은 <여왕의 것들>에 이르러 엄청난 몰입감을 선사한다. 이토록 흠뻑 빠져들어 취해버린 시대극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이번엔 다르다. <가여운 것들>은 마치 보고 있는 나 스스로를 가엾게 만들어버렸다. 충분히 알겠다. 그 어려운 원작, 설정, 각종 철학적 해석은 솔직히 외면한다. 모든 예술 장르는 즐길 때 즐거워야 하기 때문인데, <가여운 것들>은 그 선을 뛰어넘어버린 냄새가 지배적이다. 과도할 정도로 노골적인 설정과 표현은 눈을 찡그리게 했다. 그 맥락은 이해했으나 지나치게 과몰입된 서사의 특정 부분은 가위로 도려내고 싶었다. 성장이라고 해석해야 할까. 아니면 시대의 희생이라고 봐야 할까. 고통스러운 건 감당할 수 있었으나, 불편한 건 나도 사양할 수밖에...
하지만 작품에 담긴 두드러지는 감독의 성향은 전작들에 비해 안정적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돌출되고 파격적이나 이것이 마치 감독의 브랜드처럼 작용한다. 그간 시도했던 다양한 종류의 화법이 <가여운 것들>에서 종합적으로 묶여진 느낌이다.
감독은 <가여운 것들>을 포함 단 여섯 편의 작품을 완성했다. 장르나 출연배우를 떠나 감독의 이름만으로 선택하는 영화가 있다. 물론 그런 면에서 요르고스 란티모스는 이미 점찍은 감독이다. 불편했던 기억을 잊게 하고 나를 고통스럽게 만들어줄 그의 일곱 번째 작품을 어서 빨리 채찍질하고 싶다. 채찍만큼 그에게 잘 어울리는 소품도 없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