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7시 30분. 의사의 사망선고. 숨을 거둔지 20여 분이 흘렀으나 여전히 큰이모의 손과 어깨는 따뜻했다. 코와 입을 틀어막은 인공적인 의료도구가 그렇게 거추장스러워 보일 수가 없었다. 통곡했다. 각별했던 분이었고, 그 자리에 없던 엄마의 몫까지 눈물을 흘렸다. 좋은 말씀 해주라는 의사와 간호사의 권유에 눈물을 닦으며 미처 전하지 못한 마음을 몇 마디 말에 실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말은 너무 죄송하단 말뿐이었다.
가난한 시절. 짧은 배움과 넉넉하지 못한 형편으로 어느 부잣집의 입주 도우미로 당신 인생을 시작했다. 결혼도 출산도 하물며 형제마저 외면한 채 그 집에서 평생을 살아왔다. 지병이 심해져 실버타운으로 거처를 옮길 때 엄마와 함께 우리 동네로 모셔 여생을 함께 보내자고 권유했음에도 마다했다. 당신에겐 그 집의 어르신과 자녀가 더 끈끈한 가족이었다. 부정하고 싶었으나 거스를 수 없는 진심이었다. 그로 인한 오해의 실타래도 당신을 보내드리는 시간 동안 서서히 풀렸다.
장례 기간. 엄마와 다른 이모들을 대신해 모든 일을 치르며 울고 또 울었다. 피붙이라고는 형제뿐인 당신의 처지가 왜 그렇게 쓸쓸하게 느껴졌는지 모른다. 향을 바꿀 때마다 울었다. 20여 년 전 얼마 만의 외출이었을까. 다 같이 남산으로 소풍 갔을 때 내가 찍어드린 사진이 영정사진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다행히 사진 속 큰이모는 한없이 편한 얼굴로 웃고 있었다. 당신의 투박한 말투와 날 바라보던 눈빛, 모든 것들이 떠올랐다.
오후 1시 30분. 거주지 동사무소에서 사망신고를 마쳤다. 멋쩍게 물었더니 사망신고에는 증빙서류가 따로 없다고 했다. 살아생전 당신이 남긴 흔적을 정리해야 하는 일이 숙제로 남았다. 부디 누가 되지 않게끔 잘 마무리 짓겠다고 마음속으로 몇 번을 다짐했다.
사망선고를 받고 장례를 치른 뒤 사망신고까지 이어진 일주일이 채 안 되는 시간. 슬퍼하고 눈물을 흘리는 것. 배가 고파 국에 밥을 말아 입속에 밀어 넣는 것. 며칠 비운 집에 돌아와 두 아이를 바라보는 것. 모든 것들이 삶이다. 그리고 앞으로 엄마와 함께 그럴 수 있을 때까지 더 오래 더 자주 당신을 기억하고 추억해야겠다.